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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랏말싸미] 은행빚 탕감법 논란···정치적 접근의 산물?

민주당, 대출 원금 감면 가능하도록 은행법·금소법 개정안 상정
과반 의석 앞세워 밀어붙여, '판도라의 상자' 여는 결과 될 수도

 

【 청년일보 】 빚을 지고 사는 것처럼 고통스러운 일은 없다. 프랑스의 대문호 빅토르 위고는 "채권자는 상전(上典)보다 잔인하다. 상전은 육체를 혹사시킬 뿐이지만 채권자는 체면과 위신을 짓밟는다”고 말했다. 중국 청나라의 호림익(胡林翼)이라는 사람은 "빚을 안고 있으면 마치 뼈에 종기가 붙어 있는 것과 같다”고 했다. 

 

하지만 시대를 막론하고 빚을 갚지 못해 고통받는 사람은 많다. 혹독하고 잔인한 빚 독촉은 물론 자살 등 죽음으로 내몰리는 일도 생긴다. 이들의 상당수는 자산은 물론 정보가 부족한 경제적 약자일 공산이 크다.

 

이 때문에 빚의 탕감은 인권(人權)을 지키는 것이라는 주장도 나온다. 어느 누구도 빚 때문에 인권을 유린당하고, 희망을 송두리째 빼앗겨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특히 빚에 짖눌린 사람들을 부담에서 해방시켜주는 것이 경제적으로 효율적이란 시각도 있다.

 

일반적으로 강도 높은 채권 추심에 노출되면 정상적인 경제 활동이 어려워진다. 설사 경제 활동이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노력의 대가를 궁핍한 본인의 상황을 개선하는 데 사용하기보다 빚을 상환하는 데 쓰면 열심히 노력할 유인이 사라지고, 미래를 위한 투자는 엄두도 내지 못한다. 이처럼 빚의 후유증이 초래하는 인적 자원의 낭비보다 빚을 탕감해 채무자의 재기(再起)를 돕는 것이 더 경제적이라는 것이다. 

 

사실상 소액 장기 연체자는 빚을 갚을 능력이 없는 저소득층일 가능성이 크다. 이 때문에 정부가 개인의 빚을 깎아주는 정책은 예전에도 많았다. 역대 총선이나 대선에서는 '약방의 감초' 같은 공약으로 등장했다. 하지만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은행빚 탕감법'은 차원이 다른 문제다.

 

국회 정무위원회는 지난 22일 전체회의를 열고 민형배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대표 발의한 은행법 개정안과

금융소비자 보호에 관한 법률(금소법) 개정안을 상정했다. 이들 개정안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 19) 등 재난 상황에 따른 정부의 방역 조치로 자영업자나 소상공인의 소득이 급감하면 금융위원회의 조치로 대출 원금의 상환을 연장하거나 감면을 신청할 수 있도록 하는 게 주요 골자다.

 

은행에 빚 탕감을 의무화하는 강제 조항은 '과잉입법'으로 세계에 유례가 없는 것이다. 특히 대출 원금 일부를 감면해주거나 이자를 낮춰주는 채무 재조정이 아니라 아예 대출 원금을 없애주는 빚 탕감은 상상할 수 없는 무리수라는 지적이 나온다. 지금까지 법원에서 개인파산을 선고받지 않는 한 대출 원금 전액 탕감은 없었다. 

 

은행은 사기업인 동시에 대부분 상장사다. 주주들의 이해관계와 충돌할 수밖에 없다. 코로나 19로 인한 영업 제한은 정부가 했는데, 부담은 은행이 물어야한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은행법 개정안은 감면 신청을 거절한 은행에 대해서는 금융위원회가 최고 2000만원의 과태료를 물릴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금소법 개정안에는 금융상품 판매업자에게 금융소비자 보호 방안을 마련하도록 명할 수 있다는 내용을 넣어 적용 대상이 다른 금융기관으로 확대될 수도 있다. 

 

은행연합회는 재정으로 대응해야 할 재난 비용을 은행에 떠 넘기면 결국 이자 상승을 불러와 성실하게 대출을 상환하고 있는 다른 소비자에게 피해가 전가된다며 공식적인 반대 입장을 피력했다. 금융업이 규제 산업이라고는 해도 엄연히 사기업인데, 정치권의 간섭이 과도하다는 불만은 속에서 씹어 삼켰을 것이다. 

 

소관 부처인 금융위원회 역시 여당 발(發) 입법이라는 점에서 '신중해야 한다'는 조심스런 워딩을 사용했지만 결론은 반대 입장이다. 금융위원회는 코로나 19 피해 소상공인 등에 대한 지원 필요성에는 공감한다면서도 은행의 대출 원금 감면 등을 의무화하는 것은 재산권 침해, 은행의 건전성 저해, 다른 금융소비자로의 비용 전가 등 비판을 초래할 우려가 있다고 밝혔다.

 

또 금소법은 금융상품의 판매·자문에 있어 금융회사에 비해 정보나 협상력이 불리한 소비자를 보호하는 취지로 제정된 것으로 재난 등 외적 환경변화에 따른 지원 조치를 규정하는 것은 법 취지에 부합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현재 제정을 추진 중인 '소비자신용법'을 통해 개인 연체 채무자를 폭넓게 지원하는 것이 나을 것이라는 충언(?)도 곁들였다. 한마디로 번짓수를 잘못 찾았다는 것이다.

 

국회 정무위원회의 이용준 수석전문위원은 검토보고서에서 "코로나 19 상황에서 금융당국과 금융협회 간 협의를 통해 이미 대출금 만기연장, 원금·이자 상환유예 조치가 이뤄지고 있음을 고려해야 한다"고 짚었다. 법안 심사 가이드라인을 제시하는 국회 전문위원까지 반대 입장인 것이다. 

 

개정안이 통과되면 은행은 상환이 가능한지 여부를 가장 우선순위로 둘 수 밖에 없는 만큼 저신용자들의 대출은 더욱 어려워질 수 밖에 없다. 은행의 문턱이 높아지는 것이다. 재난의 정의가 모호해 빚 탕감이 남용될 우려도 있다. 결국 금융 시스템 전반의 붕괴를 야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반발이 심하자 정무위원회의 여당 간사는 "해당 법안들은 법안심사 소위에조차 상정되지 않았다"며 진화에 나섰다. 하지만 해당 법안들을 본회의에 상정해 통과시키려 한다는 관측은 지속적으로 나오고 있다. 

 

국민행복기금은 지난 2013년 채무 불이행자의 신용회복을 돕기 위해 도입됐다. 안심전환대출은 2015년 단기ㆍ변동금리 대출을 장기ㆍ고정금리 대출로 바꾸어 주는 상품으로 도입됐다. 빚 탕감을 위한 정책이 2년 주기로 반복된 셈이다. 

 

만일 정부의 빚 탕감 정책이 효과가 있다면 이 같은 정책은 규모가 점점 축소돼야 한다. 하지만 채무자들이 갚을 능력이 있음에도 채무자 구제제도만 믿고 오히려 빚을 늘리는 사례도 나타나고 있다. 성실 채무자에 대한 역차별이다. 빚 갚는 국민만 바보 만드는 정책이라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이처럼 도덕적 해이와 형평성 논란에도 불구하고 이 같은 정책이 계속되는 것은 '경제 논리'가 아닌 '정치 논리'로 접근하기 때문이란 비판이 나온다. 이번 은행빚 탕감법 역시 더불어민주당이 4·7 재보궐선거에서 참패한 만큼 민심을 잡기 위한 차원이라는 것이 대체적 분석이다. 문제는 도가 치나치다는 것이다. 

 

소득 수준을 고려해 대출 원금 일부와 이자는 면제해 줄 수 있다. 하지만 대출 원금 자체를 탕감해 주는 것은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일이 될지도 모른다. 개인회생, 워크아웃 같이 이미 있는 채무조정 제도를 통해 빚 부담을 덜어주는 것이 더욱 바람직할 수도 있다. 여당이 과반 의석을 앞세워 은행빚 탕감법을 밀어붙일 경우 포퓰리즘 청구서는 언제든 역풍이 돼 돌아올 수 있다.

 

【 청년일보=정구영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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