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청년일보 】 공군의 구호는 사회라는 활주로를 박차고 뛰어올라 더 나은 내일로 높이 비상하려는 청년들이 보여주는 간절하고 치열한 도전의 모습을 담고 있다. 청년들 사이에서 공군은 종종 안정적인 복무 환경, 높은 수준의 복지, 긴 휴가 기간과 같은 조건으로 각인된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공군의 진면목을 설명할 수 없다.
공군병의 21개월부터 조종장교의 15년까지, 의무복무의 시간은 한 청년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꿀 무게를 지닌다. 이 시간 속에서 청년들은 국방의 의무를 넘어, 인생의 자산을 설계하고 단련에 매진한다. 청년일보는 [청년이 궁금한 공군] 연재로 공군이 수행하는 임무와 현장, 특기와 조직, 그리고 그 시간이 청년의 삶과 커리어를 어떻게 바꾸는지를 조명한다. [편집자 주]
◆ 1920년 윌로우스, 독립을 향해 이륙했던 청년들
2026년 대한민국 공군은 첨단 전투기와 정밀 관제 시스템, 고도화된 기술 인프라를 바탕으로 영공을 수호하는 정예 기술군이다. 이 같은 공군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그 뿌리에는 최첨단 무기 체계가 아닌, 나라를 빼앗긴 절망 속에서도 하늘의 광복을 꿈꿨던 청년 독립운동가들의 헌신이 자리하고 있다.
대한민국 공군은 1910년대 국내·외에서 진행된 독립운동으로 첫발을 내딛게 된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19년 임시관제 '군무부'절에 육·해군 비행대 편성을 담았다. 이듬해에는 시정방침에 '비행기대' 편성을 명시했다. 도산 안창호 선생은 직접 비행기 구입에 나섰다. 이후 이러한 구상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많은 이들이 오랜 시간 노력을 기울였다.
1920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총장 노백린 장군은 재미동포들의 지원을 바탕으로 미국 캘리포니아주 윌로우스에 한인비행학교를 설립했다. 특히 쌀농사로 부를 일군 김종림은 토지와 거액의 거금을 제공했다. 한인 청년 30여 명이 낯선 타국에서 비행 기술을 익히며 조국 독립의 날을 준비했다.
학교는 1921년 대홍수에 따른 재정난으로 문을 닫았지만, 이곳에서 배운 청년 박희성과 이용근은 그해 7월 임시정부 육군 비행병 참위(현재의 소위)로 임관했다. 임시정부가 임명한 첫 비행장교였다. 이처럼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설립한 윌로우스 비행학교는 청년들이 최첨단 기술이었던 항공을 매개로 자신의 삶과 국방을 결합했던 공군 역사의 첫 활주로였다.
◆ 여의도 상공의 금강호, 하늘에 새긴 조선 청년의 기개
1921년 일본 최초의 비행사 자격시험에 유일한 조선인으로 응시해 수석 합격한 스무 살 청년이 있었다. 안창남이다. 그는 1922년 12월 10일 한반도를 그려 넣은 금강호로 여의도 상공을 비행했다. 몰려든 5만 군중은 식민지의 하늘에도 조선 청년의 날개가 뜰 수 있음을 목격했다. "떴다 보아라 안창남 비행기"라는 노래가 방방곡곡에 퍼졌다.
이듬해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을 목도한 그는 비행술을 독립운동에 바치기로 결심했다. 중국으로 망명한 안창남은 비행학교에서 청년들을 가르치는 한편 대한독립공명단을 결성해 활동하다 1930년 비행 중 순국했다.
하늘의 꿈은 성별을 가리지 않았다. 1925년 스물넷의 권기옥은 중국 윈난항공학교를 1기로 졸업하며 한국인 여성 최초의 비행사가 됐다. 최용덕과 이영무 등은 20대의 나이에 1926년 중국 국민정부 항공대 창설에 참여했다. 청년들은 남의 나라 하늘에서 조국의 하늘을 준비하고 있었다.
◆ 충칭에서 그린 대한민국 공군의 설계도
1930년대 초 백범 김구 선생이 중국 국민당 정부의 지원으로 비행사 양성을 시도한 데 이어, 1940년 충칭에서 한국광복군을 창설한 임시정부는 본격적으로 하늘로 눈을 돌렸다. 1943년 8월 국무위원회는 군무부 직할로 공군설계위원회를 설치했다. 중국 공군 출신 광복군 간부 최용덕이 부주임을 맡아 광복군 비행대 창설을 추진했다.
같은 달 공포된 조례는 최단기간 내 공군 작전을 개시하고 건군·건국 과정에서 공군의 기초를 확립한다는 목표를 못 박았다. 이듬해인 1944년부터 임시정부는 '한국 광복군 비행대' 창설을 준비했다. 미군과 합작해 공군 건설을 개시한다는 계획도 수립했다. 광복 이전에 이미 대한민국 공군의 설계도는 그려져 있었던 셈이다.
◆ 광복의 하늘과 청년들이 물려받은 하늘
1945년 8월 15일, 마침내 광복의 날이 왔다. 비행기는 없었지만 사람과 설계도가 있었다. 임시정부 광복군은 8월 18일 C-47 수송기를 이용해 중국 서안에서 한국의 여의도 비행장으로 비행했다. 이때 항복한 일본군과 대치하여 일촉즉발 직전까지 돌입하기도 하였다.
최용덕 장군은 1948년 쉰 살에 백의종군을 자청해 기본군사훈련부터 다시 받으며 공군 창설에 헌신했고, "내가 죽거든 수의 대신 공군복을 입혀달라"는 유언을 남긴 채 1969년 8월 15일, 광복절에 눈을 감았다.
106년 전 윌로우스에서 항공기의 조종간을 잡던 청년들이 그랬듯, 오늘도 대한민국 청년들은 공군의 활주로에서 각자의 이륙을 준비한다. 태동기의 청년들이 독립을 위해 꿈꿨던 하늘은 이제 청년들이 조국을 지키며 저마다의 미래를 설계하는 창공이 됐다. 오늘날 대한민국 영공을 지키는 젊은 날개들이 그 꿈의 상속자다.
【 청년일보=강필수 기자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