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청년일보 】 정부가 편의점에서 판매하는 안전상비의약품 확대를 추진하면서 약사회와 유통·제약업계 간 논쟁이 다시 불붙고 있다. 2012년 약국 외 판매제도 도입 이후 14년 만의 제도 개편이 가시화한 가운데 대한약사회는 강하게 반발하며 정부 논리에 맞서 약국 운영 현황과 판매처 안전관리 실태 등 데이터를 전면에 내세운다는 전략이다.
17일 업계에 따르면 보건복지부는 최근 하반기 업무보고를 통해 편의점 안전상비의약품 품목을 현행 13개에서 최대 20개까지 확대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편의점 상비약 판매 제도는 2012년 11월 처음 도입됐다. 약국이 문을 닫는 공휴일이나 야간 시간에 의약품을 구매하기 어렵다는 불편을 해소하기 위해서였다. 현행 약사법상 보건복지부 장관은 성분, 부작용, 인지도, 편의성 등을 고려해 최대 20개 품목 이내에서 편의점 상비약을 지정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다만 제도 도입 이후 14년 가까이 지나도록 판매 허용 의약품은 줄곧 13종에 머물러 있다. 심지어 현재는 해열진통제 중 '타이레놀정 160㎎'과 '어린이용 타이레놀정 80㎎'의 생산이 중단되어 실제로 소비자가 편의점 매대에서 구입할 수 있는 의약품은 11종에 불과하다.
정부가 제도 확대를 검토하는 핵심 배경은 의약품 접근성이다. 특히 약국이나 24시간 편의점이 없는 농어촌·도서산간 등 보건의료 취약지역에서는 현행 판매 기준이 현실과 맞지 않는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이에 따라 판매 품목뿐 아니라 판매처 진입 기준을 완화하는 방안까지 논의되고 있다.
유통업계에서는 소비자 편익을 근거로 제도 개편에 힘을 싣고 있다. 실제 편의점 안전상비약 수요는 약국이 문을 닫는 시간대에 집중되는 것으로 나타난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따르면 안전상비의약품 시장 규모는 코로나19 특수 당시인 2023년 581억원으로 정점을 찍은 뒤 2024년 555억원, 지난해 511억원으로 다소 감소했으나 도입 초기(2013년 154억원)와 비교하면 여전히 큰 외형을 유지하고 있다. 유통업계는 소비자가 급하게 찾는 지사제, 제산제, 인공눈물 등의 추가와 접근성 완화가 시급하다는 입장이다.
올해 1~5월 CU의 상비약 매출 가운데 50.5%가 오후 9시부터 오전 5시 사이에 발생했다. 소비자가 실제로 심야시간에 상비약을 찾고 있다는 점에서 판매처 확대가 접근성 개선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논리다.
반면 대한약사회는 크게 반발하고 있다. 대한약사회를 비롯해 서울, 부산, 광주 약사회 등에서 잇달아 성명서를 내고 정부의 상비약 품목 확대에 반기를 들고 있다.
이들은 접근성 문제를 단순히 편의점 판매 확대로 해결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약사회는 지난 5월 안전상비의약품 확대 대응 TF를 구성한 이후 정부·복지부·국회를 대상으로 설득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공공심야약국과 공공약국 확대, 일반의약품 안전관리 강화 등을 대안으로 제시하는 한편 국민을 대상으로 약사 상담의 필요성을 알리는 캠페인도 시작했다.
특히 약사회가 주목하는 것은 '약국이 실제로 얼마나 열려 있는가'다. 전국 2만2천여개 회원 약국을 대상으로 24시간·심야·토요일·일요일 운영 여부를 세분화한 전수조사를 진행하고 있다.
조사 결과는 향후 약사회 홈페이지뿐 아니라 포털과 온라인 지도·검색 서비스 등에 제공하는 방안을 추진한다. 심야와 휴일에도 이용 가능한 약국 정보를 국민에게 적극적으로 알림으로써 ‘약국 접근성이 낮아 편의점 판매를 확대해야 한다’는 정책 논리를 반박하겠다는 것이다.
보건의료 취약지역에 대한 데이터도 구축한다. 공공데이터를 활용해 지역별 의료·약국 접근성을 지도화하고 주민들의 의약품 이용 과정에서 발생하는 불편을 조사해 실제 취약성이 어느 정도인지 확인한다. 약사회는 8월~9월 관련 자료를 정리해 향후 복지부와 협의에서 핵심 근거로 활용할 계획이다.
편의점 판매처의 안전관리 실태 역시 약사회의 주요 공격 지점이다. 약사회가 최근 4년간 전국 1천여개 판매업소를 대상으로 현장조사를 실시한 결과, 최소 한 건 이상의 규정 위반이 확인된 판매처 비율은 2022년 95.7%, 2023년 94.1%, 2024년 94.4%, 2025년 97.2%로 집계됐다. 약사회는 품목 확대에 앞서 현재 제도가 제대로 관리되고 있는지부터 평가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추가 품목으로 거론되는 지사제도 변수다. 약사회는 디옥타헤드랄스멕타이트 성분이 2019년 만 2세 미만 및 임부 금기 성분으로 변경됐고 이후 소아·청소년 관련 허가사항도 조정됐다는 점을 들어 개별 품목의 안전성 검토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단순히 품목 수를 늘리는 방식이 아니라 연령, 기저질환, 병용약물, 오남용 가능성 등을 종합적으로 따져야 한다는 주장이다.
안전상비의약품 지정심의위원회는 2017년 무렵에도 편의점 상비약에 지사제, 제산제를 추가하는 방안을 논의했으나 대한약사회가 강력하게 반발해 무산된 바 있다.
정부가 다시 편의점 상비약 품목 확대를 추진하자 소비자단체 등은 찬성한다는 입장을 표명했지만, 약사회는 기존 제도 정비 필요성과 오남용 우려를 언급하며 반대하고 있다.
노수진 대한약사회 총무·홍보이사는 "안전상비의약품 확대 TF의 기본 방향은 끝까지 막는 것"이라며 "이를 위해서는 데이터를 통한 근거 확보가 우선이다. 8월과 9월까지 관련 자료를 충분히 축적하고 정리해 향후 복지부와의 협의에서 이를 근거로 정부를 설득할 것"이라고 말했다.
【 청년일보=맹봉주 기자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