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청년일보 】 1892년 독일의 풍자 잡지 '플리겐데 블래터'에 실린 한 그림이 있다. 오리로도, 토끼로도 읽히는 이 그림은 훗날 비트겐슈타인이 '철학 탐구'(1953)에서 "~임을 봄(seeing that)"과 "~으로 봄(seeing as)"의 인식론적 차이를 설명하는 데 인용하면서 철학적 아이콘이 되었다.
이 그림에서 동일한 대상을 두고 어떤 이는 오리를, 어떤 이는 토끼를 본다. 그리고 각자는 자신이 본 것만이 불변의 진실이라 확신한다.
이 은유는 오늘날 한국 사회의 소수자 혐오 담론에도 정확하게 들어맞는다. 세계가치조사(WVS)와 장애인실태조사(2005) 등 주요 데이터는 소수자에 대한 불관용이 통계적으로 유의하게 감소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현실의 체감은 오히려 반대 방향을 가리키는 듯하다. 즉, 어떤 이에게 한국 사회는 나아지고 있는 곳이고, 어떤 이에게 이곳은 여전히 혐오의 공간이다.
◆ 오리…데이터로 본 소수자 인식
세계가치조사(WVS, 1990–2018)와 한국 장애인실태조사(2005–2020)를 교차 분석하면, 한국 사회 소수자 인식의 뚜렷한 개선 추세가 확인된다. 이주민을 이웃으로 삼고 싶지 않다는 응답은 1990년 46.6%에서 2018년 22.0%로 24.6%p 하락했으며, 동성애자에 대한 불관용도 같은 기간 95.8%에서 79.6%로 16.2%p 감소했다. 장애인 당사자가 체감하는 차별 경험 역시 2005년 86.1%에서 2020년 62.5%로 감소하는 추세를 보였다.
이 수치의 내부 구조는 더욱 주목할 만하다. 첫째, 개선이 특정 세대에 국한되지 않았다. 둘째, 모든 연령대에서 불관용이 감소했으며, 과거 가장 관용적이었던 집단보다 최근 가장 불관용적인 집단에서 오히려 더 호의적인 수치가 나타났다. 셋째, 동일 코호트 내에서도 시간의 경과에 따라 인식이 변화했다. 이 세 가지의 사실은 해당 변화가 세대 교체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사회 전반의 구조적 전환임을 시사한다.
그러나 이 낙관적 해석은 국제 비교 앞에서 부질없다. 2018년 이주민 불관용 수치 22.0%는 OECD 16개국 중 6위에 해당했으며, 동성애자 불관용 수치 79.6%는 OECD 1위로, 2위인 튀르키예(75.8%)와도 유의한 격차를 보였다. "나아지고 있다"는 명제와 "충분하지 않다"는 명제는 동시에 참인 것이다.
◆ 토끼…데이터와 현실의 간극
인식 개선 추세가 이와같은 데이터로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현실에서 목도되는 사건들은 반대 방향을 가리키는 것처럼 보인다. 2022년 대구 이슬람 사원 건축 현장 앞의 돼지머리 시위, 2023년 서울광장 퀴어문화축제 불허 결정, 2024년 장애인 지하철 탑승 시위 중 활동가 연행 등은 혐오와 배제가 공적 공간에서 더욱 선명하게 드러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현상은 다음과 같이 해석될 수 있다.
첫째는 측정 방식의 한계이다. 세계가치조사와 같은 자기보고식 설문조사는 사회적 바람직성 편향(social desirability bias)에 구조적으로 취약하다. 응답자들은 혐오적 태도를 솔직하게 표현하기보다 사회적으로 '옳다'고 간주되는 답변을 선택하는 경향이 있다. 이 경우, 수치의 개선은 실제 태도의 변화가 아니라 혐오 표현의 사회적 비용이 상승한 결과일 수 있다. 표면 아래로 숨어든 혐오는 설문조사 방법으로는 포착되지 않는다.
둘째는 가시화의 역풍(backlash) 이다. 소수자 운동이 공론장에 진입할수록, 기존 질서에 위협을 느끼는 집단의 반응 역시 격화된다. 퀴어문화축제 참가자 수의 증가와 이에 맞선 반대 시위의 동시 팽창이 그 전형적 양상이다. 이 관점에서 혐오의 가시화는 퇴행의 증거가 아니라, 소수자 운동의 성과가 기존 권력 구조와 충돌하는 지점에서 발생하는 마찰일 것이다. 가시화를 단순히 억압의 심화로 해석하는 것은, 역풍을 운동의 전진과 구별하지 못하는 분석적 오류를 범할 위험이 있다.
이러한 생각들은 상호 배타적이지 않으며, 실제로는 공존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인식 개선이 태도의 진정한 변화인지 아니면 표현의 억제인지에 따라 개입 전략의 설계 방향이 근본적으로 달라지기에, 이러한 구분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 구조적 차별…누가 공적 공간에 존재할 수 있는가
앞서 언급한 일련의 사건들은 단순한 개인 간 갈등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그것들은 "누가 공적 공간에서 존재할 수 있는가"라는 근본적인 정치적 질문을 둘러싼 충돌이다.
장애인, 이주민, 동성애자에 대한 차별은 각기 다른 이념적 외피를 두르고 있지만 공통된 논리 구조를 공유한다. 비장애중심주의는 장애를 생물학적 결함으로 규정하며, 인종주의는 민족적 순혈성을 배제의 기준으로 삼고, 이성애중심주의는 특정 성적 지향만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설정하여 각각 배제의 경계선을 그어낸다. 생물학적 본질주의와 종교적 근본주의는 이 세 가지 차별 유형 모두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이념적 기반이다.
그러나 이 구조적 차별은 인식의 영역에만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제도 속에 녹아들어 건축물 접근성 제한, 고용허가제 속 사업장 이동 제한 조치, 동성혼의 법적 불인정 등으로 표현된다. 인식이 개선되더라도 제도가 변하지 않으면 변화는 불완전하다. 인식과 제도 사이의 이 간극이야말로, 개선 데이터와 현실 체감 사이의 괴리를 설명하는 핵심 변수 중 하나일 것이다.
더 나아가, 동성애자 인구에 대한 공식 통계 자체가 부재한다는 사실은 단순한 기술적 한계로 볼 수 없다. 가시화되지 않는 집단은 정책 대상에서 제외되고, 학술 연구의 시야에서 지워진다. 그렇기에 동성애자 불관용 OECD 1위를 기록하는 사회에서 해당 집단의 규모조차 공식적으로 파악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제도적 배제의 산물로 볼 수 있으며 문제 해결 의지의 부재로도 해석할 수 있다.
◆ 오해의 정치적 효과
하지만 이러한 차별의 유지와 재생산은 제도의 문제만으로 충분히 설명 되지 않는다. 차별을 지속시키는 또 다른 동력은 소수자 집단에 대한 체계적 오해, 그리고 그 오해를 정치적으로 동원하는 방식에 있기 때문이다.
폴 돌런(Paul Dolan)이 제시한 '신념주의(Beliefism)' 개념은 이 맥락에서 유효한 분석 틀을 제공한다. 돌런에 따르면, 인간은 자신의 신념을 정당화하는 증거에만 선택적으로 주목하고 반증을 무시하거나 왜곡하는 경향이 있다. 정치적 양극화의 상당 부분은 실질적 가치 충돌이 아니라 상대에 대한 구조적 오해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미국의 경우, 공화당 지지자들은 민주당원의 32%가 LGBT라고 인식했지만 실제 수치는 6%였으며, 민주당원은 공화당원의 38%가 연 소득 25만 달러 이상이라 믿었지만 실제는 2%에 불과했다. 이러한 인식의 과장은 당파적 적대감을 증폭시키고 대화의 가능성을 구조적으로 차단한다.
한국 사회에서도 유사한 기제가 작동한다. 여성가족부의 국민 다문화수용성 조사(2018)에 따르면, 응답자 10명 중 4명 이상이 이주민이 증가하면 범죄율이 높아질 것이라고 응답했다. 그러나 실제 외국인 범죄 발생률은 내국인의 절반 이하로 현저하게 낮다.
이 간극은 언론 보도의 구조적 편향과 무관하지 않다. 살인사건 범죄자 13명 중 1명이 외국인이었으나 살인 관련 언론 보도 6건 중 1건이 외국인 사건을 다뤘으며, 전체 범죄자 중 중국인은 200명에 불과했지만 중국인 범죄자에 대한 기사는 20개 중 1개를 차지했다. 범죄자가 외국인일 경우 내국인보다 더 강도 높게 보도되는 이 경향은, 이주민을 실체보다 위협적인 존재로 각인시킨다. 소수자는 '우리'의 불안을 투사하는 대상으로 기능하며, 그 불안은 언론과 정치를 통해 증폭되고 자원화된다.
이처럼 데이터의 부재, 미디어의 선택적 재현, 알고리즘에 의해 강화되는 확증 편향은 소수자에 대한 오해를 구조적으로 재생산한다. 그 결과 소수자와 다수자 사이의 인식 간극은 좁혀지지 않고, 오히려 '우리 아니면 그들'이라는 제로섬 구도 속에서 확대된다. 혐오는 혐오를 부르고, 배제는 또다른 배제를 정당화하게 되는 것이다.
◆ 같은 그림 앞에서
인식 개선 데이터를 앞에 두고 두 가지 상반된 해석이 경쟁할 수 있다. 하나는 "그래도 나아지고 있지 않느냐"는 점진적 낙관론이고, 다른 하나는 "혐오는 오히려 심해지고 있다"는 구조적 비관론이다.
인식이 실제로 변화하고 있다면, 그 변화가 세대 교체에 의한 것인지 아니면 개인의 태도 변화에 의한 것인지를 구별하는 것은 중요하다. 세대 교체가 주된 동력이라면 변화는 느리고 수동적이며 개입의 여지가 협소할 것이지만, 태도 변화가 가능하다면 어떤 조건과 경험이 그 변화를 이끄는지를 묻는 연구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논의의 출발점은 오리를 보는 사람에게 토끼를 보라고 설득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림을 서로 다르게 인식하고 있음을 먼저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인식론적 겸손함이 모든 시선이 동등함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구조적 차별이 실재한다는 사실은, 인식의 다양성과 별개로 검토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오리를 보든 토끼를 보든, 상반된 인식과 달리 우리가 같은 그림 앞에 서 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 청년서포터즈 9기 이나연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