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청년일보 】 노동운동은 본래 약자의 언어였다. 열악한 작업환경, 저임금, 부당해고에 맞서 집단의 목소리를 내는 것이 파업과 단체교섭의 출발점이었다. 한국에서도 1970~80년대 노동운동은 산업화의 그늘 속에서 기본적 권리를 쟁취하기 위한 저항의 역사였다.
그러나 오늘날 언론이 조명하는 노동운동의 장면은 사뭇 다르다. 대기업 정규직 노조가 영업이익의 15%를 성과급으로 요구하고, 원청을 향해 총파업을 예고한다. 이러한 뉴스를 접한 시민들의 반응은 냉담하며, "배부른 소리 한다"는 댓글이 가득하다.
이 온도차는 어디서 비롯되는 것일까? 노조에 대한 대중의 불신은 단순한 오해나 반노동 정서로 환원되지 않는다. 그 안에는 구조적으로 누적된 불만과 이질감이 자리한다.
◆ 균열하는 노동
오늘날의 노동은 단일한 계층이 아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 생산직과 사무직, 대기업과 중소기업 종사자, 사회초년생과 정년을 앞둔 중장년층이 각기 다른 이해관계 위에 서 있다. 정년 연장 요구는 청년층의 진입 기회를 잠식하고, 기본급 인상 투쟁은 같은 사업장 내 비정규직에게는 남의 일이 된다. Rueda를 비롯한 학자들은 이를 노동시장 이중화로 설명한다.
내부자(insiders)인 정규직은 고용 안정성과 단체교섭력을 바탕으로 기득권을 방어하고, 외부자(outsiders)인 비정규직은 법적 보호망 밖에서 교섭 테이블조차 마련하지 못한다. 즉, 전통적인 노동과 자본의 갈등 위에 노동 내부의 격차와 갈등까지 심화되는 구조인 것이다. 이 맥락에서 강성 정규직 노조의 파업은 사회적 연대가 아닌 내부 이기주의로 읽힌다.
◆ 성과주의의 역설
노동운동 내 또 하나의 균열은 금융화된 사회에서 등장한 새로운 이해관계자이다. 2020년대 이후 주식 투자 인구가 급격히 늘면서, 많은 시민들이 크고 작은 규모로 상장기업의 주주가 되었다. 단기적으로 주주의 입장에서 파업은 기업 가치 하락이나 손실의 위험으로 인식되기 쉽다. 그렇기에 회사 실적이 부진해도 임금과 복지를 보장받는 노동자와 달리, 손실을 고스란히 감당해야 하는 주주에게 파업을 비롯한 노동운동은 달갑지 않은 존재가 되었다.
하지만 주주와 노동자 사이의 멀어진 이 감정적 관계를 단순한 부러움으로 해석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 주주를 비롯한 대중이 노동운동을 바라볼 때 '위험은 분담하지 않으면서 이익만 요구한다'는 인식이 작동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시각은 기업의 이익 창출에 노동이 기여한 몫을 과소평가하는 문제가 있다. 그러나 그 논리를 노동운동 스스로가 사회에 납득시키지 못한 점 역시 고려해야 한다.
◆ 기업은 왜 비판을 피하는가
문제는 사회가 기업과 노조를 대하는 태도가 비대칭적이라는 데 있다. 노조가 파업을 예고하면 뉴스는 '생산 차질'과 '경제적 피해'를 전면에 내세우지만, 기업이 노동법을 위반하거나 산업재해를 은폐하는 사안은 훨씬 조용하게 소비된다.
기업들은 파견법상 제조업에서 허용되지 않는 파견 고용을 '사내하청'이라는 이름으로 수십 년째 운용해왔으며, 처벌은 솜방망이 수준에 그쳤다. 수백만 원의 벌금으로 수천억 원의 인건비를 절감하는 구조를 국가가 사실상 묵인해온 것이다. 산업재해 은폐 역시 반복되는 문제이다.
쿠팡이 산재 사망 노동자 유족에게 산재 신청을 하지 않겠다는 합의서 작성을 요구하고, 고강도 노동으로 쓰러진 노동자에게는 합의금을 제시하며 공론화를 막았다는 논란이 뉴스에 등장했을 때, 여론의 온도는 대기업 노조의 성과급 요구가 보도됐을 때와 사뭇 달랐다.
기업의 이익이 순수하게 시장에서 창출된다는 전제 또한 현실과 다르다. 대기업들은 각종 세금 감면 혜택, 연구개발 보조금, 정부 인프라 지원, 수출 금융 등 광범위한 공적 자원을 활용한다. 사회가 만들어낸 인프라와 교육 시스템이 기업 성과의 토대가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노동자가 그 성과의 배분을 요구할 때는 '이기적 행위'로, 기업이 법인세 감면을 요구할 때는 '투자 활성화'로 서술된다. 같은 이해관계의 표출이 다르게 읽히는 이 구조는 의문스럽다.
기업 지배구조의 문제도 간과할 수 없다. 기업의 경영 실패가 반복되어도 책임은 희석되거나 노동자에게 전가되어 왔다. 쌍용자동차의 정리해고를 결정한 경영진은 법적 책임을 지지 않았지만, 파업에 참가한 노동자들은 수억 원대의 손해배상 소송에 시달렸다.
대법원 2002도7225 판결은 "경영권과 노동3권이 충돌하는 경우, 기업의 경쟁력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고 판시하며 "구조조정이나 합병 등 경영상 조치는 원칙적으로 노동쟁의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보았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노조법 제2조 제5호가 노동쟁의의 목적 중 하나로 명시한 "해고"와 충돌하며, 정리해고가 그 예외로 취급되는 근거는 여전히 불분명하다.
◆ 왜 우리는 노조만 비판하는가
대중이 노조에 냉담한 데는 노동운동 내부의 문제도 있다. 대기업 정규직 노조가 비정규직의 현실을 외면하고 자신의 이익만을 극대화할 때, 그 운동은 "그들만의 리그"처럼 취급되며 사회적 정당성을 잃는다. 그러나 대중이 노동운동에 갖는 생각은 어떤 이미지가 보도되는가에도 크게 영향 받는다.
언론은 대기업 노조의 파업이나 임금 요구를 상대적으로 더 크게 다루지만, 경비원, 청소 노동자, 배달 플랫폼 종사자, 요양보호사들의 교섭 시도와 산업재해 이야기는 상대적으로 소외된다. 그 결과, 가장 열악한 현장의 노동자들이 목소리를 낼 때에도 '노조는 다 이기적이다'라는 냉소가 먼저 따라붙는다.
한국 사회가 노동운동에 요구하는 것은 결국 자제라 생각한다. 파업하지 말 것, 국익을 생각할 것, 협조할 것. 그러나 같은 사회가 기업에 요구하는 자제는 훨씬 느슨하다. 비정규직을 양산하고, 산재를 은폐하고, 부실 경영의 비용을 노동자에게 전가해도, 그것이 '경영 판단'의 영역인 한 처벌은 미약하다. 노동자의 파업이 눈에 보이는 불편을 유발하는 반면, 기업의 ‘경영판단’은 조용히 유지된다는 점도 이 비대칭적 인식을 강화한다.
Schmitter와 Katzenstein이 분석한 민주적 조합주의(democratic corporatism)는 노동·자본·국가가 제도적 틀 안에서 협상하고 타협하는 체계이다. 스웨덴, 오스트리아, 네덜란드에서 노동운동이 사회적 지지를 유지하는 배경에는 이 구조적 통합이 있었다. 노조가 임금뿐 아니라 거시경제 안정과 사회정책 설계에 함께 책임을 지는 파트너로 기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국에는 이 틀이 취약하다. 노사정 대화 기구는 존재하지만 실질적 구속력이 없으며, 교섭은 협상 테이블이 아닌 파업과 법적 공방의 장으로 이어지기 쉽다. 그 결과 노동은 사회적 협력자가 아닌 대결적 집단으로 인식되며, 노동운동은 시민들에게 지지받기 어렵다.
이러한 현실 속, 노동운동이 스스로의 한계를 직시하고 연대의 범위를 넓혀야 한다는 요구는 정당하다. 대기업 정규직 노조가 비정규직과 하청 노동자의 권리를 함께 의제로 올릴 때, 파업은 비로소 사회적 정당성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요구가 기업의 책임을 묻는 목소리를 잠재우는 데 활용되어서는 안 된다. 세금 감면, 정부 보조금, 공적 인프라의 수혜자인 기업의 사회적 책임 역시 동등하게 물어야 하기 때문이다.
기업의 성과는 주주와 경영진만의 것이 아니며, 동시에 노동자만의 것도 아니다. 다양한 이해관계자가 관여한다는 사실을 서로 인정하는 데에서, 보다 지속가능한 노동 관계와 사회적 합의의 출발점이 마련될 것이다.
【 청년서포터즈 9기 이나연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