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청년일보 】 5·18 광주 민주화운동 46주년 기념일인 5월 18일, 스타벅스코리아는 앱을 통해 '탱크데이'라는 이름의 이벤트를 열었다. 탱크 텀블러 상품을 할인 판매하면서 홍보 포스터에는 '책상에 탁!'이라는 문구를 함께 실었다.
논란이 일자 스타벅스는 "의도하지 않은 기획이었다"고 해명했다. 그러나 이 해명은 설득력이 없다. '탱크'라는 단어 하나만이었다면 우연의 여지가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포스터 안에는 두 가지 이상의 역사적 맥락이 동시에 존재했다.
'탱크데이'는 5·18 당시 계엄군이 광주 시내에 투입한 탱크를, '책상에 탁!'은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당시 경찰이 사망 원인을 은폐하며 내뱉은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는 말을 정확하게 연상시킨다. 5월 18일이라는 날짜, 탱크, 그리고 박종철. 이 세 가지가 한 장의 포스터 안에서 만난 것을 과연 우연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논란이 일자 스타벅스는 '탱크데이'를 '탱크 텀블러 데이'로, '책상에 탁!'을 '작업 중 딱~'으로 수정했다. 그런데 이 '작업 중 딱' 역시 일베(일간베스트저장소)에서 통용되는 유행어라는 사실이 곧 지적됐다. 수습을 위해 바꾼 문구조차 이런 상황을 과연 우연이라 말할 수 있는가.
결국 손정현 스타벅스코리아 대표는 해임됐고, 기획을 담당한 임원도 함께 잘렸다. 이재명 대통령은 SNS에서 이번 사태를 "저질 장사치의 비인간적 막장 행태"라며 직접 비판했다. 광주전남추모연대도 "이번 사태는 단순한 '실수'나 '우연'이 아닌 명백한 역사적 참사"라며 강력한 유감을 표명했다. 그러나 대표의 해임만으로 이 사건은 끝날 수 없다.
스타벅스는 글로벌 브랜드이다. 수십 명의 마케팅 인력이 수백 개의 프로모션을 검토하고 승인한다. 이 조직 안에서 '탱크데이'와 '책상에 탁!'이 아무런 제지 없이 공식 앱의 메인 화면에 게시 되었다는 것은, 일베 문화가 조직의 일상 언어 속에 얼마나 스며들어 있는지를 보여준다.
혐오는 커뮤니티 게시판 바깥으로 나온 지 오래다. 직장인의 책상 위에 앉았고, 기업의 마케팅 언어 안으로 들어왔으며, 공식 앱의 화면에 버젓이 게시되었다. 클릭을 유도하고, 화제를 만들고, 특정 집단에게 내부적 쾌감을 주기 위해 역사적 희생을 소재로 삼는 행위가 이제는 대기업의 마케팅 전략 안에서도 작동할 수 있는 사회가 된 것이다.
◆ 상품화된 혐오
이것은 스타벅스만의 문제가 아니다. 2019년 온라인 패션 플랫폼 무신사는 양말 광고 카드뉴스에 "속건성 책상을 탁 쳤더니 억 하고 말라서"라는 문구를 실었다. 논란이 일자 무신사는 사과하고 게시물을 삭제했다. 최근 스타벅스 사태가 불거지자 이 광고가 다시 소환됐고, 무신사는 7년 만에 재차 고개를 숙였다.
방송도 예외가 아니었다. SBS 예능 런닝맨은 2019년 자막에 "탁 찍으니 엌"이라는 문구를 내보냈다. 런닝맨은 그보다 앞선 2016년에도 노무현 전 대통령을 비하하는 일베 용어를 자막으로 사용해 방송통신위원회로부터 권고 조치를 받은 전력이 있다. 채널A 도시어부 역시 2018년 방송에서 유사한 자막으로 동일한 비판을 받았다.
열거하고 나면 비로소 보인다. 이것은 각각의 해프닝이 아니라 하나의 패턴이다. 패션 플랫폼, 예능, 글로벌 커피 브랜드까지. 혐오와 조롱은 이미 우리 사회의 거의 모든 콘텐츠 산업 안에 침투해 있다.
◆ 혐오는 어떻게 '밈'이 되었는가
혐오의 논리는 단순하다. 5·18 민주화운동을 '폭동'으로 부르고, 노무현 전 대통령을 조롱하고, 전라도를 비하하고, 세월호 희생자 가족을 모욕한다. 이 언어들은 처음에는 인터넷 커뮤니티 디씨인사이드의 일부 게시판에서 싹텄고, 일베라는 플랫폼을 거치며 하나의 '문화'로 정제되었다.
문제는 이 현상이 10~20대의 일상 언어 속으로 유입되고 있다는 점이다. 올해 스무 살이 된 2007년생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임기(2003~2008년)가 끝날 즈음 태어났다. 이 세대에게 전 대통령은 정치적 기억이 아니라 조롱의 소재로 먼저 학습된다. 경험하지 못한 역사를,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유통되는 조롱의 언어로 처음 만나는 것이다. 5·18 민주화운동도 마찬가지이다. 교과서 속 사건이기 이전에, 일베와 디씨에서 먼저 만난다.
이 세대 중 상당수가 일베 언어를 구사하는 이유를 두고, 많은 이들이 '보수화'나 '극우화'를 먼저 떠올린다. 그러나 사안의 본질은 그보다 더 단순할 수 있다. 사상이 일베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일베에 속하고 싶어서 사상을 맞추는 것이 더 크게 작용할 수 있다.
혐오의 언어를 공유하는 것은, 그 집단 안에서 내부인으로 인정받는 매개체로 작용한다. 익명의 연대, 집단적 조롱을 함께 웃어넘기는 쾌감, 혼자가 아니라는 감각. 이것이 진짜 동기일 수 있다. 지구가 평평하다고 믿는 사람이 처음부터 그 신념을 가지고 태어나지 않듯, 일베 언어를 구사하는 이들 중 다수가 처음부터 극우 사상을 가진 것이 아닐 수 있다. 소속감을 위해 혐오를 소비하기 시작했고, 반복 속에서 그 언어가 자신의 것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는 신념에서 출발한 혐오보다 설득으로 바뀌기 어렵다는 점에서 더 위험하다. 플랫폼이 혐오를 오락으로 포장하고, 집단이 그것을 유대의 도구로 삼는 구조가 유지되는 한, 콘텐츠는 끊임없이 재생산된다.
◆ 재난 앞에서도 동원되는 조롱
조롱과 혐오는 온라인 커뮤니티 안에만 머물지 않는다. 세월호 참사 당시 유가족을 향해 쏟아진 조롱, 이태원 참사 직후 확산된 피해자 비하 게시물들은 이들이 국가적 재난의 현장까지 침투했음을 보여준다.
고통받는 사람의 슬픔을 조롱의 재료로 삼는 것, 그것이 '웃긴 밈'의 외양을 띠고 유통될 때 사회는 망가진다. 이것은 단순한 악취미가 아니다. 이들이 피해자의 목소리를 희화화함으로써 진상규명 요구는 무력화되고, 연대의 감각은 마비된다. 그렇기에 혐오는 때때로 의도적으로 설계된 정치적 도구이기도 하다.
이번 스타벅스 사건도 같은 구조 안에 있다. 계엄군의 탱크가 광주 시민을 향해 진입하던 날을 '탱크데이'로 명명하는 것, 고문으로 숨진 청년을 향해 내뱉어진 거짓말을 광고 카피로 재활용하는 것은 역사적 폭력을 오락 콘텐츠로 전환하는 행위이다. 희생자의 죽음이 유머의 소재가 될 때, 폭력은 두 번 가해진다.
◆ 표현의 자유는 혐오의 면죄부가 아니다
"왜 이러한 발언들을 처벌하지 않는가"라는 질문 앞에서 우리는 늘 '표현의 자유'라는 벽과 마주한다. 물론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 표현의 자유는 핵심적 가치이다. 그러나 표현의 자유는 모든 발화를 보호하지 않는다. 특정 집단을 향한 조직적, 반복적 혐오 표현, 역사적 희생자를 능멸하는 행위는 표현의 자유가 아니라 타인의 존엄을 침해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독일은 나치즘을 미화하거나 홀로코스트를 부정하는 행위를 강력하게 처벌한다. 그리고 이것을 표현의 자유 침해라 보지 않는다. 한국은 2021년에야 5·18 민주화운동을 폭동으로 왜곡하는 행위에 대한 처벌 규정(5·18역사왜곡처벌법)을 만들었다. 그러나 특정 집단을 향한 혐오 표현을 국가가 직접 규율하는 포괄적 법제는 여전히 부재하다.
처벌만이 답은 아닐 수 있다. 그러나 처벌조차 없는 사회는, 혐오와 조롱에 대해 사실상의 허가증을 내준 사회라고 생각된다.
◆ 사회가 방치해온 것들
2008년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광우병 시위를 '좌파의 음모'로 규정하고, 시민사회를 적대시하는 정치 언어가 제도권에서 공공연하게 유통되었다. 권력이 특정 집단을 적대시하는 언어를 공공연히 사용할 때, 그 언어는 인터넷을 타고 증폭되며 사회 전체로 내려온다.
그 이후 정권이 바뀌어도 이를 해독하려는 사회적 노력은 충분하지 않았다.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은 형식적이었고, 플랫폼 규제는 뒤처졌으며, 혐오 표현에 대한 사회적 낙인은 끝내 충분히 형성되지 않았다.
광주에서 죽어간 이들을 텀블러 할인 이벤트의 문구로 쓸 수 있다고 생각한 사람이 있었다면, 그 사람을 그렇게 만든 사회에 대해서도 우리는 물어야 한다. 그리고 그 질문에 더 이상 눈을 감아서는 안 된다.
혐오는 상품이 될 수 없다. 그리고 조롱은 용기가 아니다.
【 청년서포터즈 9기 이나연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