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청년일보 】 "기술은 노동시간을 줄이지 못했고, 청년의 진입 기회를 먼저 줄이고 있다."
얼마 전 노동절 특집으로 방송된 한 TV 프로그램에서 인공지능(AI)과 과학기술이 이토록 발전했음에도 왜 우리의 근로시간은 좀처럼 줄어들지 않는지에 대한 문제를 다룬 장면이 인상 깊게 남았다. 기술은 분명 더 많은 일을 더 빠르게 처리할 수 있게 만들었다. 문서를 요약하고, 자료를 정리하고, 이미지를 만들고, 고객 응대까지 자동화하는 시대가 되었다. 그렇다면 생산성 향상의 결과는 당연히 노동시간 단축과 삶의 여유로 이어져야 할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현실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기술은 노동자의 시간을 해방하기보다 더 많은 일을 더 짧은 시간 안에 처리하도록 요구하는 방향으로 활용되고 있다. 생산성 향상은 개인의 여가와 삶의 회복으로 돌아오기보다 조직의 효율화, 인력 감축, 비용 절감의 논리로 흡수된다. 특히 청년들에게 AI 시대의 변화는 '덜 일해도 되는 미래'가 아니라 '처음 일할 기회조차 줄어드는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최근 한국고용정보원의 2025~2035 정성적 일자리 전망 보고서는 이러한 논의를 보다 차분하게 바라보게 한다. 사무, 금융, 보건, 의료, 디자인 등 182개 주요 직업군을 분석한 결과, 2035년까지 170개 직업에서 일자리가 늘거나 적어도 현재 수준을 유지할 것으로 전망됐다. 감소 또는 다소 감소가 예상되는 직업은 12개에 그쳤다. 이는 AI가 인간의 일자리를 전면적으로 빼앗을 것이라는 막연한 공포와는 다른 분석이다.
보고서는 AI가 모든 직업을 없애기보다 반복적이고 단순한 업무를 대체하는 한편, 고차원적 판단과 고객 대응, 데이터 기반 의사결정, 전문성이 요구되는 직무의 수요를 늘릴 것으로 내다봤다. 실제로 출납창구 사무원, 은행 사무원, 디자인·편집 보조 종사자처럼 정형화된 업무는 타격을 받을 가능성이 크지만, 데이터 분석 관련 사무직, 디지털금융 및 자산관리 사무직, 마케팅 기획 사무원, 전문의사, 간호사, 사회복지사, 문화·관광·콘텐츠 분야의 수요는 오히려 확대될 수 있다는 전망도 제시됐다.
문제는 여기서 시작된다. 직업의 총량이 유지된다고 해서 청년의 기회가 유지되는 것은 아니다. 일자리가 사라지지 않더라도, 청년이 노동시장에 처음 진입해 배우고 성장할 수 있는 초급 직무가 줄어들면 청년 고용의 문턱은 더 높아진다. 과거에는 단순 사무, 보조 업무, 자료 정리, 현장 지원, 고객 응대 같은 일이 청년에게 첫 경험을 제공했다. 완벽하지 않아도 조직 안에서 시행착오를 겪으며 성장할 수 있는 완충지대가 있었다.
하지만 AI와 자동화 기술은 바로 이 영역부터 빠르게 대체하고 있다. 기업은 더 이상 신입에게 맡기던 기초 업무를 충분히 남겨두지 않는다. 그 결과 채용 시장은 처음부터 즉시 전력감을 요구하는 구조로 바뀌고 있다. 사회는 청년에게 경험이 부족하다고 말하면서도, 정작 경험을 쌓을 수 있는 자리를 줄이고 있다. 이것이 AI 시대 청년일자리 문제의 핵심이다.
따라서 청년일자리 정책은 단순히 “AI가 일자리를 빼앗을 것인가”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더 중요한 질문은 “AI 시대의 새로운 일자리에 누가 진입할 수 있는가”이다. 일자리는 유지될 수 있다. 그러나 그 일자리가 이미 숙련된 사람에게만 열려 있다면 청년에게 미래는 없다. 기술은 발전하는데 청년의 첫 출발선이 사라진다면, 그것은 혁신이 아니라 세대 간 기회의 단절이다.
앞으로의 노동시장에서 살아남는 사람은 AI에게 밀려나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AI를 자신의 도구로 활용할 수 있는 사람일 것이다. AI는 단순 반복 업무를 대체하지만, 동시에 기획하고 해석하고 판단하는 사람의 역량을 더욱 중요하게 만든다. 결국 중요한 것은 AI와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AI를 활용해 더 나은 결과를 만들어내는 능력이다.
문제는 이 능력이 개인의 노력만으로 길러지기 어렵다는 데 있다. 누군가는 대학, 기업, 전문교육, 네트워크를 통해 AI 활용 역량을 빠르게 습득하지만, 누군가는 그런 기회에 접근조차 하지 못한다. AI 활용 능력의 격차는 곧 청년일자리 격차로 이어질 수 있다. 디지털 전환이 또 다른 불평등의 장벽이 되지 않도록 하려면, 청년정책은 단순한 취업 알선이나 단기 인턴 지원을 넘어 AI 활용 역량을 사회적으로 보장하는 방향으로 재설계되어야 한다.
첫째, 청년일자리 정책은 초기 경력 형성 직무를 새롭게 만들어야 한다. 반복 업무가 AI로 대체되는 흐름 자체를 막을 수는 없다. 그러나 그 자리를 단순히 없애는 데서 끝나서는 안 된다. AI가 산출한 결과를 검토하고, 데이터를 해석하며, 고객과 현장을 연결하고, 조직의 의사결정을 보조하는 새로운 초급 직무를 설계해야 한다. 청년에게 필요한 것은 단순 보조 업무가 아니라 기술과 사람 사이에서 판단력을 기르는 훈련형 일자리다.
둘째, AI 도입에 대한 공공 지원은 청년고용과 연계되어야 한다. 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기업의 디지털 전환, 자동화, 스마트워크, AI 시스템 도입을 지원한다면 그 성과가 고용 없는 생산성 향상으로만 귀결되어서는 안 된다. 공공 지원을 받은 기업이 청년 채용, 직무교육, 인턴십, 직무전환 훈련 등에 참여하도록 유도할 필요가 있다. 기술 도입의 이익이 기업 내부의 비용 절감에만 머물지 않고, 미래 인력 양성으로 환류되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셋째, 청년 직업교육의 방향도 바뀌어야 한다. 지금 필요한 것은 단순한 AI 도구 사용법 교육이 아니다. 프롬프트를 입력하는 기술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데이터를 읽는 능력, 질문을 설계하는 능력, 결과를 검증하는 능력, 현장의 맥락을 해석하는 능력, 윤리적 판단까지 함께 길러야 한다. AI 시대의 역량은 기술 숙련만이 아니라 문제를 정의하고 해결하는 종합적 역량이다.
AI 시대의 청년일자리 정책은 청년을 기술 변화의 피해자로만 바라보는 데서 멈춰서는 안 된다. 동시에 “각자 알아서 AI를 배워 살아남으라”고 말해서도 안 된다. 그것은 정책의 책임을 개인에게 떠넘기는 일이다. 앞으로 살아남는 사람은 AI와 경쟁하는 사람이 아니라 AI를 활용하는 사람이라면, 정책의 역할은 더 많은 청년이 AI를 자신의 언어와 도구로 삼을 수 있도록 지원하는데 있다.
기술은 인간의 노동을 대체할 수도 있지만, 인간의 가능성을 확장할 수도 있다. 그 차이를 결정하는 것은 기술 자체가 아니라 사회가 어떤 제도를 설계하느냐다. AI가 소수의 생산성만 높이는 도구가 될 것인지, 더 많은 청년의 기회를 확장하는 기반이 될 것인지는 지금의 선택에 달려 있다.
청년일자리 정책은 이제 단순한 취업률 관리에서 벗어나야 한다. AI 시대에 필요한 것은 일자리 숫자를 세는 정책이 아니라 청년이 노동시장에 진입하고, 기술을 활용하며, 사회적 역할을 획득할 수 있도록 돕는 정책이다. 기술이 노동시간을 줄이지 못하고 청년의 진입 기회를 먼저 줄이고 있다면, 정책은 그 지점에서 다시 시작되어야 한다. 청년에게 필요한 것은 시혜가 아니라 전환의 기회이며, AI 시대의 공정한 노동시장은 그 기회를 보장하는 데서 출발한다.
글 / 박이슬 국무조정실·국무총리비서실 청년정책조정위원회 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