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라밸(일과 삶의 균형)'은 오늘날의 청년에게 사치가 됐다. 청년이 마주한 일자리(Work)의 문턱은 갈수록 높아지고, 삶(Life)의 기본 조건인 주거 공간(House)은 만질 수 없는 신기루와 같이 어른거린다. 과거의 청년이 더 나은 삶을 위해 워라밸을 추구했다면, 이제 청년은 생존을 고민한다.
취업 관문 앞에서 ‘쉬었음’을 강요당한 청년들, 급여의 상당 부분을 주거비와 대출 이자로 쏟아부으며 독립을 미루는 이들에게 결혼과 출산은 더 이상 자연스러운 삶의 과정이 아니다. 그것은 수익성과 리스크를 계산해야 하는 복잡한 셈법의 프로젝트로 변모했다.
이에 청년일보는 일(Work)과 삶(Life), 그리고 집(House)이 맞물린 교착 상태를 ‘워라하밸(Work·Life·House·Balance)’이라는 확장된 틀로 기록한다. 이를 통해 통계의 숫자 뒤에 숨어있던 청년들의 ‘조건부 포기’와 ‘강요된 선택’을 조명한다. 구직 현장에서 내뱉는 한숨부터 경력 단절의 공포, 그리고 부동산 계약서 앞에서 표류하는 미래 설계까지, 파편화된 청년 담론을 하나로 엮었다. [편집자 주]
【 청년일보 】 관련 통계 작성 이후 '쉬었음' 청년 수치가 역대 최대치를 기록했다.
기업의 신규 및 신입 채용이 지속적으로 감소하는 가운데, 구직 자체를 단념하고 '취업의 문' 앞에서 멈춰선 청년들이 급증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쉬었음 청년이 증가할 경우 결국 사회와 기업 모두에게 악영향을 끼치게 될 것이라면서, 이들을 위한 사회의 포용적 관점과 지원이 절실하다고 제언하고 있다.
9일 국가데이터처의 자료에 따르면, 올해 1월 기준 쉬었음 청년은 작년 동기 대비 3만5천 명 증가한 46만9천 명으로 집계됐다. 이는 2021년 1월(49만4천 명) 이후 가장 높은 수치다.
쉬었음 청년은 구직 활동도, 일할 의사도 없는 청년층을 의미한다.
쉬었음 청년 가운데 대졸 이상 비율도 점증하고 있다. 청년 42만1천 명 중 대학교 이상 청년이 17만4천 명에 육박했다. 전체 쉬었음 청년 중 46.7%가 대학교 이상을 졸업한 뒤에도 구직에 실패했다는 의미다.
실제 '고학력'으로 분류되는 청년 세대가 구직에 실패해 아르바이트 등 단기 일자리로 생계를 이어가는 사례도 증가하고 있다.
서울 내 유명 대학을 졸업한 한 20대는 "재학할 당시 최대한 휴학하고, 눈높이를 낮추면서까지 일자리를 얻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결국 구직에 실패했다"며 "현재는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며 용돈벌이를 하며 생활하고 있다"고 말했다.
유사한 상황의 또 다른 20대는 "구직에 계속해서 실패하다 보니 구직 활동을 위한 자신감이나 동력도 크게 떨어져 도전 자체를 하기가 꺼려지는 상황"이라며 "차라리 기존에 목표했던 꿈을 포기하고 간단한 일을 하며 생계를 유지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다"고 전했다.
전문가들은 이처럼 쉬었음 청년층이 증가하는 주요 요인으로 ▲양질의 일자리 부족 ▲경력직 채용 선호 풍토 등을 거론하고 있다.
국가데이터처가 작년 12월 발표한 '2024년 일자리행정통계 작성 결과'에 따르면 2024년 대기업 일자리는 총 443만 개로 전체 일자리(2천671만 개) 중 16.6%를 차지했다.
대기업에서 새롭게 발생한 일자리는 18만2천 개였지만, 같은 기간 26만3천 개의 일자리가 줄어들어 총 8만1천 개가 감소했다. 구체적으로 대기업 비중이 높은 금융, 보험 업종 등에서의 일자리는 6만 개 이상 감소했다. 신규 일자리 발생률 역시 4.1%에 그쳤다.
한 대기업 인사 담당자는 "대내외적 경제 여건이 악화됨에 따라 기업 입장에서도 마냥 일자리를 늘릴 수 없는 처지에 놓였다"며 "청년층의 어려움에 공감하지만, 불안정한 여건에서 재무 구조에 가장 큰 부담이 되는 인건비를 감소시키는 방향으로 기조가 설정되고 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고 설명했다.
청년층 고용을 책임질 기업들이 신입 사원이 아닌 경력직에 대한 채용을 늘리고 있다는 점 역시 쉬었음 청년이 증가하는 중요한 요인으로 꼽힌다.
대한상공회의소가 작년 9월 경제계 소통플랫폼 소플을 통해 500여 개 기업 인사 담당자를 대상으로 실시한 '하반기 기업의 채용 트렌드 조사'에 따르면, 응답 기업의 51%가 '채용 시 경력직을 선호한다'고 밝혔다.
반면 '신입을 선호한다'고 응답한 기업은 10.3%에 그쳤다.
실제 상위권 채용 플랫폼 캐치가 지난해 12월 시행한 조사를 보면, 2025년 대기업 정규직 신입 채용 공고는 총 2천145건으로, 2024년 3천741건 대비 43% 감소했다.
대기업과 중소기업을 막론하고 신입이 아닌 경력직을 선호하는 풍토는 더욱 확산하고 있다.
또 다른 대기업의 한 인사 담당자는 "같은 인건비가 투입된다면 기업으로서는 채용 이후 위험 부담이 적고, 즉각 업무에 투입 가능한 인력을 채용하는 게 더욱 합리적 선택"이라며 "가용 가능한 자원이 점차 한정되면서 '보장된' 인원을 채용하려는 경향이 이전보다 더 강화됐다"고 설명했다.
50인 규모의 한 중소기업 인사 담당자도 "기업의 규모가 작으면 작을수록 인원 채용에 대한 확실한 성과를 기대하기 때문에 신입보다는 경력직을 채용하려는 것"이라며 "최근 학력 등 취업 이전 스펙보다는 실제 업계 내에서의 경력과 포트폴리오를 중시하고 있다"고 부연했다.
실제 상당수의 청년이 목표하는 300인 이상의 대기업에서 일할 수 있는 자리는 지속해서 감소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쉬었음 청년이 추후 경제적 관점에서 큰 부담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우려를 내놓고 있다.
한 경제계의 기업구조 전문가는 "쉬었음 청년이 증가하면 증가할수록 사회경제적 관점에서 '생산성 손실'이라는 막대한 손해를 감수할 수밖에 없는 구조가 형성될 가능성이 높아진다"며 "청년은 목표했던 꿈은 고사하고, 실제 실무 현장에서 경력을 쌓을 경험이 부족해지고, 이를 기피하는 기업이 이들을 채용하지 않는 악순환이 더욱 공고해지고 있는 것도 실체적 현실"이라고 짚었다.
그는 "먼저 가용 노동 시간이 비교적 긴 청년층을 '쉬었음' 상태로 방치하는 것은 사회경제적 측면에서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행보"라며 "청년 세대가 노동 시장에 참여하지 않을 경우 연평균 약 9조 원가량의 사회적 비용이 발생한다는 연구도 있다"고 소개했다.
이어 "기업이 신규 인력 채용과 양성에 소극적인 모습을 보이면 보일수록 쉬었음 청년 증가에 따라 기업들이 맞이할 미래 고용 시장 환경도 부정적으로 변화할 것"이라며 "경력직 채용 선호 현상이 이어지면, 현재의 경력직들이 은퇴할 시기가 도래할 경우 이 자리를 승계할 수 있는 적절한 인력을 찾기 더욱 어려워질 것"이라고 분석했다.
또한 쉬었음 청년이 끝내 구직을 단념한 상태에서 심리적 좌절을 느끼며 은둔형 청년으로 고착될 가능성이 높다는 점도 우려하고 있다.
청년 전문 연구 단체인 스페셜스페이스의 안현종 전문위원은 "현장에서 쉬었음 청년을 만나게 되면 구직 활동 과정에서의 좌절로 인한 정신적·신체적 활력과 자신감이 상당히 저하돼 있는 경우가 상당하다"며 "구직 단계에 있거나 쉬었음 상태에 있는 청년이 그렇지 않은 청년에 비해 사회 관계적 측면에서도 다소 뒤처져 있는 게 현실"이라고 짚었다.
안 위원은 "지속적으로 좌절과 어려움을 겪게 된 청년이 결국 쉬었음 청년으로 변모할 경우, 은둔형 청년으로 고착될 가능성이 상당히 높아진다"며 "쉬었음 상태가 고립, 은둔을 촉발할 수 있는 중대한 기제가 될 수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안 위원은 쉬었음 청년의 재기를 위해 사회적 차원의 보다 포용적 이해와 지원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일각에서는 쉬었음 청년을 구제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즉각 일자리를 제공하는 방법이라고 주장하지만, 현실은 이와 다르다"며 "이들이 고용 시장에 복귀해 자신의 능력을 효과적으로 발휘하기 위해서는 먼저 이들이 저하된 정신적·신체적 활력을 증진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피력했다.
안 위원은 "실제 쉬었음 청년 중에는 구직에 대한 열망이 큰 이들도 상당하다"며 "사회가 조금 더 포용적 시각으로 다양한 지원 프로그램에 대한 확대된 지원을 제공해 줄 수 있다면, 쉬었음 청년의 사회 복귀 시기도 더욱 앞당겨질 수 있을 것"이라고 전했다.
【 청년일보=김원빈 기자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