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구석구석] ⑫ 전국 1위 '청년 도시' 관악...법전 덮고 노트북 켠 'S밸리'의 도약

등록 2026.01.10 10:35:05 수정 2026.01.10 10:35:19
김재두 기자 suptrx@youthdaily.co.kr

청계천 철거민이 일군 '달동네'와 1975년 서울대 이전...'가난과 지성'이 공존
신림선으로 '교통 오지' 오명 벗었지만...반지하·옥탑·고시원 '주거 빈곤' 숙제

 

<서울 구석구석: 공간에 새겨진 도시 변화의 서사> 시리즈는 서울의 역동적인 변화를 '공간의 재구성'이라는 프리즘으로 분석한다. 과거의 유산과 현재의 삶, 그리고 미래를 향한 도시의 전략이 교차하는 지점을 찾아, 그 현장의 모습과 변화를 입체적으로 다룬다. 도시의 물리적 변화가 개인의 일상, 경제, 문화, 심지어 정치적 지형까지 어떻게 바꾸어 놓았는지 살펴봄으로써, 서울이라는 거대 도시의 다층적인 정체성을 탐구하는 데 의미가 있다. 12번째 장소로, 철거민의 눈물과 고시생의 땀방울이 서린 땅에서 청년 벤처의 요람으로 변모하는 관악구를 살펴본다. [편집자 주]

 

【 청년일보 】 서울의 남쪽 관문, 웅장한 바위산인 관악산이 병풍처럼 둘러싼 관악구는 산의 모양이 마치 '갓(冠)을 쓴 모습'과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험준한 산세만큼이나 이곳은 지난 반세기 동안 서울에서 가장 치열한 삶의 투쟁이 벌어졌던 현장이기도 하다.

 

관악구의 현대사는 '이주'와 '생존'의 기록이다. 1960년대 서울 도심 재개발과 청계천 복개 공사 등으로 갈 곳 잃은 철거민들이 대거 이주해 정착한 곳이 바로 관악산 자락의 봉천동과 신림동이었다. 가파른 언덕배기에 판잣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형성된 '달동네'는 가난하지만 억척스럽게 서울살이를 버텨낸 서민들의 보금자리였다.

 

가난했던 이 땅의 운명이 바뀐 결정적 계기는 1975년 '서울대학교의 이전'이었다. 종로구 동숭동에 있던 서울대 캠퍼스가 관악산 기슭으로 옮겨오면서 관악구는 단숨에 '지성의 전당'을 품은 대학 도시로 위상이 격상됐다. 이때부터 관악구는 달동네의 애환과 최고 지성들의 열정이 기묘하게 공존하는 독특한 정체성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 '고시생'의 성지에서 '1인 가구'의 해방구로

 

서울대 이전과 함께 신림동(현 대학동) 일대는 대한민국 근대화 엘리트 양성의 산실인 '고시촌'으로 변모했다. 1980~90년대, 입신양명을 꿈꾸는 전국의 수재들이 이곳으로 몰려들었다. 좁은 고시원 방 한 칸에서 '개천에서 용 난다'는 희망 하나로 밤을 지새우던 고시생들의 풍경은 관악구를 상징하는 아이콘이었다.

 

그러나 2017년 사법시험 폐지는 이 지역의 공간을 다시 한번 뒤흔들었다. 고시생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자리는 이제 사회초년생과 주머니 가벼운 청년 1인 가구들이 채우고 있다.

 

과거의 고시원은 세련된 셰어하우스로 리모델링됐고, 두꺼운 법전이 쌓여있던 고시 서점은 트렌디한 카페나 코인세탁소로 간판을 바꿔 달았다.

 

비록 '사시 합격' 현수막은 사라졌지만, 강남과 여의도로 출퇴근하는 직장인들이 유입되면서 이 지역은 여전히 서울에서 가장 저렴한 물가와 주거비를 자랑하는 '가성비 동네'로서의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다.

 

최근 개통 4년 차를 맞은 경전철 신림선은 이러한 변화에 기폭제가 되었다. 지하철 2호선의 혼잡함을 분산하고 여의도 샛강역까지 16분 만에 주파하는 교통 혁명은 관악구를 단순한 베드타운에서 서남권 교통의 요지로 격상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 서울대 품은 '관악 S밸리', 벤처 창업의 요람으로

 

'소비하는 고시촌'에서 '생산하는 벤처 밸리'로의 전환은 현재 관악구의 최대 화두다. 그 중심에는 낙성대 일대에 조성된 벤처창업 거점 공간인 '관악 S-밸리'가 있다.

 

관악구는 서울대학교라는 국내 최고의 인적 자원을 보유하고 있음에도, 그동안 이를 지역 경제 활성화로 충분히 연결하지 못한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이에 구는 낙성대동과 대학동 일대를 벤처기업육성촉진지구로 지정하고, 서울대와 협력해 창업 공간 제공과 투자 유치 지원에 사활을 걸었다.

 

2026년 현재, 이곳에는 AI(인공지능), 바이오, 핀테크 분야의 유망 스타트업 수백 개가 둥지를 틀고 있다. '샤로수길'로 대변되는 서울대입구역 상권의 활력과 어우러져, 관악구는 젊은 창업가들이 모여들어 아이디어를 교류하고 혁신을 만들어내는 거대한 '오픈 캠퍼스'이자 '한국형 실리콘밸리'로 진화 중이다.

 

◆ 화려한 '청년 수도'의 이면...여전한 '지옥고'의 그늘

 

하지만 관악구가 풀어야 할 숙제도 만만치 않다. 화려한 '청년 수도'라는 수식어 뒤에는 여전히 열악한 주거 환경이라는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

 

관악구는 서울에서 전월세 거주 비율과 반지하 주택 비율이 가장 높은 지역 중 하나다. 이른바 '지옥고(지하·옥탑방·고시원)'로 불리는 주거 빈곤 형태가 여전히 만연하다.

 

몇 해 전 기록적인 폭우로 인한 침수 피해는 이곳의 취약한 주거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바 있다. 비좁은 언덕길을 따라 형성된 노후 주택가는 꿈을 좇는 청년들이 감내해야 할 고단한 현실이기도 하다.

 

최근 신림1구역 등 대규모 재개발 사업이 속도를 내고 있지만, 이는 양날의 검이다. 주거 환경 개선이라는 긍정적 측면과 함께, 저렴한 임대료를 찾아 모여든 청년들이 젠트리피케이션으로 인해 또다시 외곽으로 밀려날 수 있다는 우려가 공존한다.

 

대학동에서 부동산을 운영하는 A대표는 "이 동네 월세가 진짜 싸다. 예전에는 학생들이 정말 많았는데, 지금은 직장인도 꽤 있고, 유튜브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는 것 같다"라며 "신림선이 개통하고 나선 여의도 직장인 수요도 꽤 늘었다"라고 말했다.

 

이어 "다만 재개발 이야기가 나오니 월세도 계속 오르고 있는 추세다"라고 전했다.

 

 

◆ '관악산의 정기' 이어받아...상생의 도시로

 

관악구는 지금 과도기적 변화의 한복판에 있다. 철거민들이 일군 터전 위에 고시생들이 머물다 갔고, 이제는 그 자리를 벤처 창업가들이 채우고 있다.

 

관건은 '상생'이다. 서울대라는 엘리트 집단과 지역 주민 간의 괴리를 좁히고, 재개발의 혜택이 원주민과 가난한 청년들에게도 돌아갈 수 있는 포용적인 정책이 절실하다.

 

관악산의 강인한 바위처럼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꿈을 잃지 않는 청춘들이 모인 곳. '개천의 용'은 전설이 되었을지 몰라도, 세상을 바꿀 '유니콘 기업'을 꿈꾸는 청년들의 열정이 관악구의 밤을 다시 환하게 밝히고 있다.
 


【 청년일보=김재두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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