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구석구석: 공간에 새겨진 도시 변화의 서사> 시리즈는 서울의 역동적인 변화를 '공간의 재구성'이라는 프리즘으로 분석한다. 과거의 유산과 현재의 삶, 그리고 미래를 향한 도시의 전략이 교차하는 지점을 찾아, 그 현장의 모습과 변화를 입체적으로 다룬다. 도시의 물리적 변화가 개인의 일상, 경제, 문화, 심지어 정치적 지형까지 어떻게 바꾸어 놓았는지 살펴봄으로써, 서울이라는 거대 도시의 다층적인 정체성을 탐구하는 데 의미가 있다. 9번째 장소로, 낡은 공장 지대에서 서울 트렌드의 최전선으로 변모한 성동구를 살펴본다. [편집자 주]
◆ 성(城) 밖의 땅, 서울 산업화의 심장이 되다
【 청년일보 】성동(城東)이라는 지명은 말 그대로 '한양도성(도성)의 동쪽'이라는 방위 개념에서 유래했다. 조선 시대에는 도성 안에서 소비되는 채소를 공급하는 농경지이자, 동대문을 통해 지방으로 나가는 길목 역할을 했다.
성동구가 오늘날과 같은 산업 기지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 경제 개발 계획이 본격화되면서부터다. 정부는 도심과 인접하면서도 한강과 중랑천을 끼고 있어 물류 이동이 용이한 성동구 일대를 '준공업지역'으로 지정했다.
이때부터 성수동을 중심으로 인쇄소, 가발 공장, 봉제 공장, 자동차 정비소들이 대거 들어섰다.
특히 성수동 일대가 '수제화의 메카'로 자리 잡게 된 결정적 계기는 국내 제화 산업을 이끄는 대기업들의 입주였다. 금강제화와 에스콰이아 등 굴지의 제화 브랜드들이 성동구 일대에 공장을 가동하면서, 가죽 원단부터 부자재, 가공에 이르는 거대한 하청 생태계가 조성되었다.
이후 1990년대 들어 서울역 염천교와 명동의 수제화 업체들이 높은 임대료를 피해 이미 산업 인프라가 탄탄하게 갖춰진 성수동으로 대거 이주해오면서, 이곳은 대한민국 수제화 생산의 70% 이상을 담당하는 최대 집적지로 거듭났다.
◆ '한국의 브루클린', 붉은 벽돌과 폐공장이 빚어낸 공간의 미학
2000년대 들어 제조업이 쇠퇴의 길을 걸으며 공장들이 하나둘 문을 닫자, 도시는 활력을 잃고 회색빛 침묵에 잠겼다. 그러나 텅 빈 창고와 낡은 붉은 벽돌 건물들이 방치되던 그 시점, 변화의 바람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불어왔다.
가난한 예술가와 사회적 기업가들은 강남이나 홍대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성수동만의 독특한 공간감에 주목했다. 과거 인쇄소나 물류 창고로 쓰였던 건물들은 높은 층고와 기둥 없는 '오픈 스페이스를 갖추고 있어, 실험적인 예술 활동이나 전시를 펼치기에 최적의 조건처럼 보였ㄷ.
낡은 공장을 부수고 매끈한 새 건물을 짓는 대신, 거친 콘크리트 골조와 붉은 벽돌 외벽을 그대로 살리는 '재생'을 택했다. 2011년, 정미소와 물류 창고로 쓰이던 건물을 패션쇼장과 갤러리 카페로 개조한 '대림창고'의 등장은 성수동의 운명을 바꾼 결정적 신호탄이었다.
이어 금속 부품 공장을 개조해 녹슨 철문과 낡은 타일을 인테리어 요소로 활용한 '카페 어니언' 등이 연이어 성공을 거두며, 성수동은 '낡음'을 '세련됨'으로 재해석한 '인더스트리얼 디자인'의 성지로 자리 잡았다.
성동구청의 정책적 지원도 한몫했다. 구는 성수동 고유의 경관을 지키기 위해 '붉은 벽돌 건축물 보전 및 지원 조례'를 제정, 붉은 벽돌 건물을 리모델링하거나 신축할 때 공사비를 지원했다. 덕분에 성수동은 난개발을 피하고, 붉은 벽돌이 주는 따뜻하고 빈티지한 통일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오늘날 성수동은 단순한 카페 거리를 넘어 글로벌 브랜드들의 거대한 '브랜딩 캔버스'로 진화했다.
2022년 문을 연 '디올 성수'는 수년 뒤 사라질 전제하에 지어진 기간 한정 컨셉 스토어임에도, 공장 지대 한복판에 화려한 유리 온실 구조물을 세우는 파격을 감행했다. 보수적인 럭셔리 브랜드가 청담동이 아닌 성수동을 선택했다는 사실은 이곳이 '트렌드의 최전선'임을 입증하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디올의 성공은 다른 브랜드들의 진출을 부추기는 기폭제가 되었고, 이제 성수동은 매주 수십 개의 팝업 스토어가 열리고 사라지며 전 세계의 트렌드가 가장 빠르게 소비되고 재생산되는 거대한 쇼케이스 현장이 되었다.
◆ '마용성'의 대장주, 강남 넘보는 부동산과 '영 앤 리치'의 유입
성동구의 가파른 위상 변화는 부동산 지표와 인구 구성에서도 명확히 드러난다. 성동구는 마포, 용산과 함께 이른바 '마용성'으로 불리며 강북 부동산 시장을 주도하고 있다.
작년 서울시가 발표한 개별공시지가 결정·공시 자료에 따르면 성동구의 상승률은 서울 25개 자치구 중 가장 높은 수치를 기록하며 강남구와 서초구를 제쳤다. 이는 성수동 일대 상권 활성화와 재개발 기대감이 반영된 결과로 분석된다.
인구 구성의 변화 또한 극적이다. 기존의 생산직 노동자나 토박이 거주민 대신, 고소득 전문직과 문화 예술계 종사자, 성공한 스타트업 CEO 등 이른바 '영 앤 리치'들이 대거 유입되고 있다.
서울숲 인근의 '갤러리아 포레', '트리마제', '아크로 서울포레스트' 등 초고층 주상복합 단지는 이러한 신흥 부유층의 상징적인 거처로 자리 잡았으며, 성수동을 단순한 핫플레이스를 넘어 서울의 새로운 부촌 지도로 편입시켰다.
◆ 유니콘 기업의 입성, 그리고 젠트리피케이션의 그늘
문화적 부상과 함께 성동구의 산업 지형도 급변했다. 낡은 공장 부지에는 최첨단 지식산업센터와 업무 빌딩이 들어섰고, 그 자리를 IT와 엔터테인먼트 분야의 '유니콘 기업'들이 채우고 있다.
패션 플랫폼 무신사가 성수동에 둥지를 틀었고, SM엔터테인먼트가 사옥을 이전했으며, 게임사 크래프톤은 이마트 성수점 부지를 매입해 대규모 복합 사옥을 건립 중이다. 성동구는 이제 단순한 소비 상권을 넘어 '성수 실리콘밸리'라 불리며 강남과 판교를 위협하는 신흥 업무 지구로 부상했다.
그러나 화려한 변신의 이면에는 젠트리피케이션이라는 짙은 그림자도 드리워져 있다. 상권이 활성화되면서 임대료가 천정부지로 치솟았고, 초기 성수동의 정체성을 만들었던 가난한 예술가들과 영세한 수제화 공장들은 높은 월세를 감당하지 못해 외곽으로 밀려나고 있다.
성수동에서 부동산 중개업소를 운영 중인 한 공인중개사는 "성수역 인근은 이제 개인이 매장을 열기에는 진입 장벽이 너무 높아졌다"라며 "팝업스토어가 하루에도 몇 개씩 생기고 없어지면서 건물주들이 호가를 계속 올리는 추세라 월 임대료만 6~7천만 원에 달하는 건물도 있다"고 말했다.
◆ 화려한 '성수' 밖, 성동구의 다채로운 '다층적 매력'
성동구의 정체성을 '성수동' 하나로만 규정하기에는 그 스펙트럼이 너무나 넓다. 성수동이 트렌드를 좇는 젊은이들의 해방구라면, 그 외의 지역은 서울 시민들의 치열한 삶과 휴식이 공존하는 생활의 터전이다.
성동구의 심장부인 왕십리는 서울 동북부 최대의 교통 요충지다. 지하철 2호선, 5호선, 경의중앙선, 수인분당선이 교차하는 왕십리역은 하루 유동 인구만 수십만 명에 달하며, 성동구청과 한양대학교가 인접해 있어 행정과 교육, 상업이 유기적으로 결합된 활력을 뿜어낸다.
금호동과 옥수동은 과거 가파른 언덕배기에 판자촌으로 이뤄진 대표적인 '달동네'였으나, 지금은 한강을 조망하는 고급 아파트 촌으로 변모했다. '뒷구정(압구정의 뒷동네)'이라는 별칭이 붙을 정도로 강남 접근성이 뛰어나 신혼부부와 전문직 종사자들이 선호하는 서울의 대표적인 주거지로 자리 잡았다.
반면 청계천 하류와 맞닿은 용답동과 송정동은 여전히 서울의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자동차 매매 시장과 낡은 연립주택들이 모여 있는 이곳은 화려한 개발의 흐름에서는 한 발빗겨나 있지만, 최근 성수동의 확장과 함께 소규모 공방과 카페들이 스며들며 조용한 변화를 준비하고 있다.
◆ 붉은 벽돌과 마천루, 달동네와 힙플레이스의 공존
성동구는 이처럼 극단적인 풍경이 공존하는 기묘한 도시다. 서울숲 인근에는 대한민국 상위 1%가 거주하는 초고층 주상복합 단지가 마천루를 이루고 있지만, 길 하나 건너편에는 붉은 벽돌의 낡은 공장과 오래된 골목길이 여전히 숨을 쉰다.
이러한 이질적인 풍경의 공존은 성동구만의 독특한 경쟁력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도시가 해결해야 할 양극화의 숙제이기도 하다. 화려한 팝업 스토어의 불빛 뒤편에는 치솟는 임대료를 견디지 못해 떠나는 원주민들의 그림자가 있고, 초고층 아파트의 그늘 아래에는 여전히 개발을 기다리는 노후 주택가들이 남아 있다.
성동구는 낡은 공장에 문화를 입혀 도시를 되살린 재생의 모범 답안을 제시했다. 하지만 이제는 '힙(Hip)함'이 자본에 잠식되어 본래의 색깔을 잃지 않도록, 그리고 성수동의 활력이 왕십리와 금호, 용답으로 골고루 퍼져나갈 수 있도록 지속 가능한 도시의 미래를 고민해야 할 시점이다.
【 청년일보=김재두 기자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