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구석구석: 공간에 새겨진 도시 변화의 서사> 시리즈는 서울의 역동적인 변화를 '공간의 재구성'이라는 프리즘으로 분석한다. 과거의 유산과 현재의 삶, 그리고 미래를 향한 도시의 전략이 교차하는 지점을 찾아, 그 현장의 모습과 변화를 입체적으로 다룬다. 도시의 물리적 변화가 개인의 일상, 경제, 문화, 심지어 정치적 지형까지 어떻게 바꾸어 놓았는지 살펴봄으로써, 서울이라는 거대 도시의 다층적인 정체성을 탐구하는 데 의미가 있다. 그 16번째 장소로, 대한민국 산업화의 심장에서 디지털 경제의 요새로 탈바꿈한 구로구를 조명한다. [편집자 주]
【 청년일보 】 구로(九老). '아홉 명의 노인이 장수했다'는 전설에서 유래한 지명은 이곳이 본래 평화로운 마을이었음을 암시한다. 하지만 현대사에서 구로구는 장수 마을의 여유보다는 치열한 생존의 현장으로 기억된다.
1980년 영등포구에서 분리되어 독립 자치구가 된 구로구는 태생부터 대한민국 경제 성장의 최전선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1964년 국내 최초의 국가산업단지인 '구로공단'이 조성되면서 구로구는 상전벽해를 겪었다.
논밭이던 땅에 공장이 들어서고, 전국 각지에서 일자리를 찾아 몰려든 청춘들이 둥지를 틀면서 구로는 '한강의 기적'을 쏘아 올린 베이스캠프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과거 미싱 돌아가는 소리와 여공들의 땀방울이 채웠던 공간은 이제 서버가 돌아가는 열기와 개발자들의 키보드 소리로 대체되었다. 잿빛 굴뚝이 사라진 자리에는 통유리로 마감된 거대한 'IT 요새'들이 들어섰고, '가발'과 '봉제'를 만들던 손길은 이제 '게임'과 'AI' 산업을 이끌고 있다.
◆ '구로공단' 지우고 'G밸리'로...수직으로 솟은 산업 생태계
구로구 변화의 핵심은 '수직화'다. 과거 넓은 부지를 차지하던 저층 공장들은 이제 20~30층 높이의 아파트형 공장(지식산업센터)으로 변모했다. 구로디지털단지(G밸리)는 2026년 현재 1만 개가 넘는 기업과 15만 명 안팎의 IT 인력이 상주하는 거대 산업 클러스터로 자리 잡았다.
특히 넷마블의 사옥인 'G타워'를 비롯해 스카이라인을 형성한 고층 빌딩들은 구로가 더 이상 낙후된 공장 지대가 아님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점심시간이면 사원증을 목에 건 젊은 직장인들이 '깔깔거리' 등 식당가로 쏟아져 나오는 풍경은 강남 테헤란로와 다를 바 없다는 평이다. 과거 '공순이', '공돌이'로 비하되던 산업 역군들의 자리는 연봉 1억 원을 호가하는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들이 채웠다.
다만 이 거대한 산업 단지는 '평일 한정'의 활기라는 한계도 안고 있다. 주말이면 직장인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면서 빌딩 숲은 거대한 세트장처럼 적막해진다. 상주인구가 부족하고 업무 시설에 편중된 도시 구조가 빚어낸 전형적인 '도심 공동화' 현상이다.
평일엔 발 디딜 틈 없는 거리가 주말엔 텅 비어버리는 극단적인 풍경은 구로디지털단지가 여전히 '일터'로서의 기능에만 치우쳐 있음을 보여준다.
◆ 병목에 갇힌 출퇴근길...악명 높은 '수출의 다리'
화려한 성장의 이면에는 여전히 풀지 못한 숙제도 남아있다. 구로디지털단지의 상징이자 고질적인 문제인 '수출의 다리'가 대표적이다.
1970년대 구로공단에서 생산한 제품을 실어 나르기 위해 건설된 이 다리는, 이제 출퇴근 시간마다 거대한 주차장으로 변한다. 산업 구조는 21세기로 넘어왔지만, 교통 인프라는 20세기 유산에 머물러 있는 탓이다.
좁은 도로 용량이 폭발적으로 늘어난 유동 인구를 감당하지 못하면서, '수출의 역군'을 나르던 다리는 직장인들 사이에서 '통곡의 다리'로 불리고 있다.
디지털단지의 번영 바로 길 건너편, 가리봉동에는 또 다른 시간이 흐른다. 영화 <범죄도시>의 배경이 되기도 했던 이곳은 과거 시골에서 상경한 노동자들이 몸을 뉘던 쪽방촌, 일명 '벌집'이 밀집했던 곳이다.
노동자들이 떠난 자리는 코리안 드림을 꿈꾸며 건너온 중국 동포(조선족)와 외국인 노동자들이 채웠다. 한글 간판보다 중국어 간판이 더 흔한 '연변 거리'는 최첨단 IT 타운과 기묘한 동거를 이어가고 있다.
2026년 현재 가리봉동은 도시재생 사업을 통해 도로가 정비되고 앵커 시설이 들어섰지만, 여전히 구로의 화려한 스카이라인과는 대조적인 낡은 질감을 간직하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 굴뚝 연기 걷힌 하늘...주거지로의 변신
산업단지 이미지가 강했던 구로구는 주거 환경에서도 변화를 꾀하고 있다. 고척스카이돔 개장 이후 고척동 일대는 문화와 체육이 어우러진 주거지로 거듭났고, 옛 영등포교도소 부지에 들어선 고층 주상복합과 상업 시설은 구로구의 서쪽 스카이라인을 바꿨다.
안양천을 따라 이어진 산책로와 생태 공원은 회색빛 공장 도시의 이미지를 지우는 일등 공신으로 꼽힌다. 오염된 물이 흐르던 안양천은 이제 점심시간 직장인들의 쉼터이자 주민들의 산책 코스로 사랑받고 있다.
G밸리 내 게임 개발사에서 일하는 A씨는 "건물도 깨끗하고 맛집도 많아 평일에는 활기가 넘친다"라며 "하지만 가끔 주말에 출근하면 유령 도시처럼 너무 조용해서 밥 먹을 곳도 마땅치 않다. 좀 삭막한 느낌"이라고 말했다.
구로구는 한국 산업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한 공간에 압축된 박물관과도 같다. 가발 공장의 땀방울이 IT 타워의 데이터로 치환된 이곳은, 끊임없이 스스로를 파괴하고 재구성하며 생존해 온 서울의 적응력을 잘 보여주는 사례로 꼽힌다.
굴뚝 연기는 사라졌지만, 구로의 엔진은 여전히 뜨겁다. 평일의 전쟁 같은 치열함과 주말의 적막함이 교차하는 G밸리는, 구로의 시간이 멈추지 않고 미래를 향해 흐르고 있음을 증명하는 상징적인 장면이다.
【 청년일보=김재두 기자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