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청년일보 】 퇴직연금 기금화 논의가 급물살을 타면서 금융권 최대 현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당정이 이르면 이달 중 퇴직연금을 국민연금처럼 기금으로 통합·운용하는 방안을 내놓을 예정이어서 은행·증권·보험업계 전반이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13일 정치권에 따르면 더불어민주당과 정부는 최근 국회 당정협의회를 통해 퇴직연금 기금화 방안을 2026년 경제성장전략의 핵심 과제로 추진하기로 뜻을 모았다. 현재 예금·적금 등 원리금 보장형 상품에 과도하게 쏠린 퇴직연금 구조를 개편해 장기 수익률을 끌어올리겠다는 구상이다.
퇴직연금 기금화는 근로자 개인이 금융사를 선택해 직접 운용하는 계약형 방식에서 벗어나, 연금공단이나 기금이 자산을 모아 전문적으로 운용하는 제도다. 자산 규모를 키우고 투자 전문성을 높여 수익률을 제고하겠다는 취지다.
한정애 더불어민주당 정책위의장은 지난 7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2026년 경제성장전략 당정협의회’ 이후 브리핑에서 “퇴직연금 기금화와 관련해 현재 연구용역이 진행 중인 만큼 1월 중 별도의 당정 협의와 고위 당정을 개최해 보다 속도감 있게 논의하기로 했다”며 “관련 진행 상황은 1월 중 실무 협의와 고위 협의를 통해 공유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정부 내에서는 고용노동부가 중심이 돼 제도 설계를 진행 중이다.
퇴직연금 기금화 논의는 갑작스러운 이슈가 아니다. 정부 차원의 본격적인 추진은 김문수 고용노동부 장관 시절 가시화됐다.
고용부는 올해를 ‘퇴직연금의 질적 도약기’로 규정하고, 기금형 퇴직연금 도입을 핵심 과제로 제시했다. 이를 위해 지난해 ‘기금형 퇴직연금 제도 도입 추진 자문단’을 출범시켜 사업장 규모별 기금형 모델, 수탁법인 요건, 관리·감독 체계 등을 논의하고 있으며, 상반기 논의를 거쳐 하반기 법안 발의를 목표로 하고 있다.
기금화 논의가 제도 전반으로 확산되면서 노사정이 한 테이블에 앉는 초유의 상황도 연출됐다. 고용노동부는 ‘퇴직연금 기능 강화를 위한 노사정 TF’를 출범시키고, 퇴직연금 도입 의무화와 기금형 제도 도입을 핵심 의제로 다루고 있다.
TF에서는 사업장 규모별 의무화 시점과 영세·중소기업 부담 완화 방안, 기금 운용 주체와 이해상충 방지 장치 등이 논의된다. 청년유니온 등 청년 대표도 참여해 퇴직연금이 세대 간 노후소득 격차로 이어지는 문제 역시 함께 다룬다는 계획이다.
정부와 정치권이 기금화를 밀어붙이는 가장 큰 근거는 해외 사례다. 미국 401k의 최근 5년 평균 수익률은 약 10%에 달하고, 호주의 슈퍼애뉴에이션은 연 5%대, 네덜란드의 기금형 퇴직연금도 5~7% 수준의 수익률을 기록하고 있다.
반면 한국 퇴직연금의 평균 수익률은 2%대에 머물러 있다. 다만 일본과 영국처럼 계약형과 기금형을 병행하는 국가에서는 두 방식 간 수익률 차이가 크지 않다는 점에서 기금화 실효성에 대한 반론도 제기된다.
금융권의 반응은 엇갈린다. 퇴직연금 기금화가 제도 안정성과 운용 전문성 강화 측면에서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의견과 국민연금 등 공적 기금이 퇴직연금 사업자로 추가 참여할 경우 민간 금융사와의 공정 경쟁을 저해할 수 있다는 의견이 나온다.
한 증권업계 관계자는 “퇴직연금을 기금화하면 기업은 미래 퇴직금 지급 책임을 분산시켜 부담을 덜 수 있고, 자금 관리 효율성도 높아질 수 있다”며 “자산 운용 전문성을 가진 기관이 자금을 관리하게 되면 연금 자산의 장기 수익률 개선도 기대된다”고 말했다.
다만 “전문가가 운용하더라도 시장 변동성과 불확실성으로 인해 기대에 못 미치는 수익률이 발생할 가능성은 상존하는 만큼, 리스크 관리 장치가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또 다른 증권업계 관계자는 “대형 기금이 등장하면서 규모의 경제가 작동할 경우 수수료 인하 압박이 불가피하다”며 “국민연금 등 공적 기금이 퇴직연금 사업자로 추가 참여할 경우 민간 금융사와의 공정 경쟁을 저해할 우려가 있다”고 지적했다.
아울러 기금형 도입 시 시장이 수익률 중심으로 재편되면서 경쟁이 한층 심화되고, 상대적으로 수동적인 성향의 가입자들이 기금형으로 이동할 가능성이 높다는 분석도 나온다. 이 경우 계약형 대비 낮은 수수료 구조가 형성돼 금융사 간 수수료 경쟁 역시 더욱 치열해질 것이란 전망이다.
금융권 전반에서는 퇴직연금 기금화가 연금 수익률 제고라는 정책 목표를 달성할 수 있을지와 함께, 금융시장 구조와 사업자 간 경쟁 구도에 미칠 파장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한 금융권 관계자는 “기금화 논의가 어떻게 결론 나느냐에 따라 퇴직연금 시장의 판도가 크게 달라질 수 있다”며 “올해는 퇴직연금 사업자라면 단 하루도 긴장을 늦출 수 없는 해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학계에서도 퇴직연금 기금화에 대해 긍정과 부정적인 시각이 혼재하는 분위기다.
서지용 상명대 경영학과 교수는 "퇴직연금 기금화의 장점은 대규모 자산을 장기 투자하는 방식으로 수익률을 높일 수 있다는 것"이라며 "단점이라면 운영이 잘못됐을 시 실패 문제가 있다. 개인 차원에서 투자 성향에 맞지 않는 상품을 선택해 대규모 손실이 생기면 근로자에게 오히려 부담을 줄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정부는 영리 조직이 아닌 만큼 세금 및 적자 국채 발행 등으로 부담을 줄 수 있어 가급적이면 민간에서 담당하는 게 바람직한 측면도 있다"며 "국민의 퇴직 이후 생활을 보장하는 게 정부의 역할이라면 관여할 수 있겠지만 일정 부분 부담되는 면도 있다"고 덧붙였다.
현재 고용노동부에선 아직 제도에 대한 논의가 진행중이다. 다만 기존 계약형 퇴직연금을 폐지하는 방식은 검토 대상이 아니며, 근로자에게 선택지를 하나 더 부여하는 방향으로 검토가 이뤄지고 있다는 입장이다.
고용노동부 퇴직연금복지과 관계자는 기금형 퇴직연금 도입과 관련해 “현재 노사가 기금형 제도의 도입 시 어떤 형태가 적절한지에 대해 논의 중이며, 아직 구체적인 합의에 이르지는 않은 단계”라고 밝혔다.
이어 “재원 조성 방식이나 투자처, 운영 계획 등 구체적인 내용은 아직 정해진 바 없다”며 “향후 기금형 제도가 도입된다면 기금을 수탁·운영하는 법인이 생기게 될 것이고, 세부 운영은 해당 법인이 결정할 사안”이라고 설명했다.
이달 중 예정된 관련 발표에 대해서는 “새로운 정책을 확정해 발표한다기보다는 당정 차원에서 그간의 논의 경과를 공유하는 수준이 될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또 금융권의 관심과 관련해 “기금형 도입을 검토하고는 있지만, 기존 계약형 퇴직연금을 폐지하고 전면적으로 기금형으로 전환하는 방식은 아니다”라며 “현행 계약형 제도는 유지하되, 근로자가 원할 경우 기금 수탁 법인에 맡길 수 있는 선택지를 하나 더 만드는 방향으로 검토 중”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기금화라는 표현이 기존 제도를 대체하는 것처럼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며 “현재 계약형 퇴직연금 자산을 일괄적으로 이전하는 방식은 검토 대상이 아니다”라고 덧붙였다.
【 청년일보=김두환 / 신정아 기자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