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청년일보 】 국내 게임 산업의 지형도가 송두리째 바뀌고 있다. 과거 '확률형 아이템'과 '모바일 MMORPG'에 의존하던 성장 공식은 폐기되고, 그 자리를 인공지능(AI) 기반의 제작 혁신과 글로벌 시장을 겨냥한 AAA급 대작들이 채우고 있다.
20일 크래프톤·엔씨소프트·넷마블·시프트업·카카오게임즈 등 국내 주요 게임사가 공시한 2025년도 사업보고서에 따르면, K-게임 산업은 제작 방식·성과·시장 타깃이라는 3대 축을 바탕으로 전례 없는 대전환기를 맞이하고 있다.
◆ "직급보다 프로젝트 성과"…'성과주의' 보상 체계 새물결
이번 사업보고서에서 가장 파격적인 대목은 보상 구조의 변화다. '연차'에 따라 연봉이 오르던 호봉제 성격의 잔재는 완전히 사라졌다. 대신 실질적 기여도가 높은 핵심 개발자나 프로젝트 리더에게 최고경영자(CEO)보다 높은 보상을 책정하는 '성과주의'가 대세로 자리 잡았다.
가장 눈에 띄는 곳은 크래프톤이다. 김창한 대표가 80억원대의 보수를 받으며 업계 1위를 기록한 가운데, PUBG(배틀그라운드) IP를 총괄하거나 신규 프로젝트를 이끄는 실무진들이 수십억원대의 보상을 챙겼다. 이는 단순히 급여가 높은 것이 아니라, 실적과 연동된 상여와 주식기준보상(RSU)이 결합된 결과다.
신흥 강자 시프트업의 행보는 더욱 극적이다. '승리의 여신: 니케'와 '스텔라 블레이드'를 잇달아 흥행시킨 유형석 최고디자인책임자(CDO)는 김형태 대표보다 높은 7억5천200만원의 보수를 기록했다. 민경립 최고전략책임자(CSO) 역시 29억3천만원을 수령하며 사내 최고 보수 자리에 올랐다. 이는 직책의 높고 낮음보다 '누가 흥행을 주도했는가'를 보상의 척도로 판단한 것으로 풀이된다.
넷마블과 카카오게임즈 역시 주식 기반 보상을 확대하고 있다. 특히 넷마블은 자회사 넷마블네오의 권영식 사장에게 '나 혼자만 레벨업: 어라이즈'의 성공에 따른 파격적인 인센티브를 지급하며 프로젝트 단위의 보상 철학을 명확히 했다.
◆ AI, 보조 도구 넘어 제작 인프라로…'콘텐츠' 만드는 방식 바뀐다
과거의 AI가 단순한 길찾기나 적 캐릭터의 움직임을 제어하는 수준이었다면, 이제는 게임 생산 시스템 그 자체를 바꾸는 '인프라'가 됐다. 실제로 사업보고서 내 '연구개발활동' 섹션은 온통 생성형 AI와 자동화 기술로 도배되어 있다.
크래프톤은 'AI-First' 전략을 공고히 하며 자체 파운데이션 모델 개발에 참여하는 등 가장 공격적인 투자를 단행하고 있다. 특히 'Diffusion 모델'을 기반으로 게임 내 환경과 오브젝트를 자연스럽게 생성하고 합성하는 연구에 매진 중이다.
이는 수백명의 아티스트가 수개월간 매달려야 했던 작업을 AI가 단시간에 처리함으로써 제작 비용을 획기적으로 낮추고 창의적 영역에 인력을 집중시키겠다는 전략이다.
넷마블은 제작 공정 전반에 AI 에이전트를 배치했다. AI 애니메이션 생성 기술을 통해 캐릭터 움직임을 자동화하고, AI 플레이어가 게임 밸런스를 24시간 테스트한다. 심지어 글로벌 시장 진출을 위한 로컬라이징(번역 및 현지화) 작업까지 AI가 도맡는다.
엔씨소프트 또한 모션 사운드 자동 배치와 클라이언트 크래시 자동 분석 시스템을 통해 서비스 품질을 높이는 동시에 개발 효율성을 극대화하고 있다.
이렇듯 게임사의 경쟁력은 '얼마나 많은 인력을 투입하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고도화된 AI 파이프라인을 보유했느냐'로 이동하고 있다. 게임 제작이 노동집약적 산업에서 기술집약적 '콘텐츠' 제작으로 진화하고 있는 셈이다.
◆ "안방은 좁다"…K-게임, 글로벌 AAA급 시장 '정조준'
한국 게임사들의 눈은 더 이상 국내 MMORPG 시장에 머물지 않는다. 사업보고서에 나타난 매출 구조와 신규 사업 계획을 살펴보면 북미, 유럽 등 서구권 콘솔 및 PC 시장을 겨냥한 AAA(트리플 A)급 대작 확보에 사활을 걸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시프트업은 '스텔라 블레이드'의 글로벌 성공을 통해 콘솔 기반 AAA급 프랜차이즈의 가능성을 입증했다. 이를 바탕으로 차기작 또한 글로벌 시장을 직접 타깃으로 하는 대형 프로젝트로 기획하고 있다.
크래프톤은 '글로벌 멀티 스튜디오' 체제를 강화하며 일본의 BCPE 매디슨 홀딩스 지분 인수, 미국 언노운 월즈 인수 등 해외 IP 영입에 속도를 내고 있다. 이는 배틀그라운드에 이은 제2, 제3의 글로벌 메가 히트작을 해외 현지 스튜디오를 통해 직접 뽑아내겠다는 의지로 해석된다.
엔씨소프트와 카카오게임즈도 변화의 바람을 탔다. 엔씨소프트는 리스크 관리 TF를 가동하며 내실을 다지는 한편, 장르 다변화와 플랫폼 확장을 통해 글로벌 유저 접점을 넓히고 있으며, 카카오게임즈는 글로벌 서비스 인프라를 클라우드 기반으로 고도화하며 다국가 동시 론칭 시스템을 구축, 퍼블리싱 역량을 세계 수준으로 끌어올리고 있다.
◆ 게임사, 이제는 'AI 콘텐츠 기술'이 관건
이번 사업보고서들은 K-게임이 모바일이라는 좁은 틀을 깨고 글로벌 AI 콘텐츠 기업으로 나아가는 출사표와 같다.
던지는 메시지는 명확하다. 한국 게임 산업은 이제 단순한 소프트웨어 개발업을 넘어 'AI 기반 콘텐츠 생산 플랫폼'으로 변모하고 있다.
확실한 보상으로 성과를 끌어올리고, AI 자동화 공정을 통해 제작 효율을 극대화하며, 그렇게 만들어진 AAA급 콘텐츠로 전 세계 시장에서 승부하는 구조다.
업계 관계자는 "이 세 가지 톱니바퀴가 유기적으로 맞물리는 기업이 생존할 수 있는 시대가 도래했다"며 "향후 1~2년 내에 AI가 생성한 고품질 AAA 게임이 시장의 판도를 결정짓게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 청년일보=조성현 기자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