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암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회장. [사진=호암재단] ](http://www.youthdaily.co.kr/data/photos/20250624/art_17497987312977_397a88.jpg)
일제강점기와 6·25 전쟁을 거치며 한국 경제는 폐허 상태에 놓였지만, 국민들은 굴하지 않고 ‘한강의 기적’을 이뤄냈다. 이 과정에서 우리 기업들도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특히 이병철 창업주는 ‘사업보국’이라는 신념 아래 섬유 산업에 뛰어들며 산업의 기초를 다졌고, 이건희 선대회장은 반도체에 과감히 도전해 한국을 ‘반도체 강국’으로 이끌었다. 현재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은 바이오를 차세대 성장동력으로 삼고 글로벌 경쟁력 강화에 힘을 쏟고 있다. 청년일보는 각 시대의 전환점을 만들어온 삼성의 성장동력 변화를 되짚어본다. [편집자주]
<글 싣는 순서>
(上) “이병철 회장, 제일모직으로 한국 섬유산업 새 시대 열다”
(中) "이건희의 결단, 반도체 불모지에서 세계 1위로"…삼성 반도체 신화의 시작
(下) “이재용이 키운 삼성 바이오…신수종에서 4조 클럽까지”
【 청년일보 】 호암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회장이 세상을 떠난 지도 어느덧 40년이 가까워진다.
일제강점기였던 1938년 3월 1일, 대구 수동에서 ‘삼성상회’를 창립하며 시작된 삼성그룹의 역사는 여기서 비롯됐다.
이 회장은 이때부터 ‘삼성(三星)’이라는 상호를 사용했다. ‘삼(三)’은 한민족이 좋아하는 숫자로, ‘큰 것, 많은 것, 강한 것’을 상징하며, ‘성(星)’은 밝고 높으며 영원히 빛나는 존재를 뜻한다.
호암은 ▲사업보국 ▲인재제일 ▲합리추구 등의 경영 철학을 바탕으로 한국 경제가 오늘에 이르기까지 발전해 오는데 선도적 역할을 수행했다.
15일 호암재단에 따르면, 호암은 1951년 1월 11일, 한국전쟁의 와중에도 부산에서 삼성물산을 설립하며 본격적으로 기업 활동을 이어갔다.
이후 그는 제조업의 중요성을 절감하고 제당업에 진출, 1953년 제일제당을 설립했다.
같은 해 11월 6천300㎏의 설탕 시제품 생산에 성공하며 당시 전량 수입에 의존하던 설탕의 국산화를 이뤄냈고, 수입 의존도를 100%에서 7%까지 낮추는 쾌거를 거뒀다.
제당업 성공에 이어 이 회장은 섬유산업에 본격 뛰어들었다. 기술 경쟁력을 확보한 최신 설비의 모직공장을 세워 국가 경제에 이바지하겠다는 목표였다.
일본 기술자 하야시 고헤이에게 마스터플랜을 의뢰한 이병철 회장은 모직공장 건설허가를 정부에 신청하고, 독일의 방직기계(스핀바우사)를 인수한다.
그렇게 1954년 9월 제일모직이 탄생했다.
6개월만에 소모(梳毛) 공장을 완공한 제일모직은 1956년 5월 2일 마지작 점검을 마치고 시운전에 들어갔다.
초기에는 품질에 대한 인식 부족으로 저렴한 가격임에도 수요 확보에 어려움을 겪었지만, 점차 기술과 품질이 향상되며 시장의 신뢰를 얻었다. 1957년 10월 26일, 제일모직을 시찰한 이승만 대통령은 “애국적 사업”이라며 ‘의피창생(衣被蒼生, 백성에게 옷을 입히다)’이라는 휘호를 남기기도 했다.
◆ 제일모직, 한국 섬유산업 선봉자 역할…“국민 의복 브랜드 확장”
당시 한국은 자본과 기술이 거의 전무하고, 전력 공급마저 불안정한 상황이었다.
이 회장은 이러한 여건에서도 노동집약적 제조업, 특히 섬유산업이 국가 산업화의 돌파구가 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인적 자원 외에는 내세울 것이 없었던 시기에, 원자재 수입→가공→수출로 이어지는 제조 기반을 갖추는 것이 국가 경제를 살리는 길이라는 철학이었다.
1954년 9월에 설립된 제일모직은 1956년 5월 공장 조업을 개시하고 6월 골덴텍스 브랜드를 출시했다. 이듬해인 1957년 1월에는 염색공장을 준공했다.
1972년 3월 골덴니트로 기성복 사업을 개시한 제일모직은 1975년 5월 유가증권시장에 상장한다. 1970년대 제일모직은 수원, 안양, 구미 등지에 공장을 준공하고 사세를 확장했다.
1979년 11월 섬유연구소를 설립한 제일모직은 1983년 8월 남성복 브랜드 ‘갤럭시(GALAXY)’를 론칭하고, 1987년 2월에는 남성복 브랜드 ‘카디날’을, 1989년 2월에는 빈폴(BEANPOLE) 브랜드, 2012년 2월에는 에잇세컨즈(8seconds) 브랜드를 각각 론칭했다.
여성복 시장에서도 제일모직은 활발한 브랜드 확장을 시도했다. 2019년 ‘구호플러스’를 시작으로, 2021년 ‘코텔로(Kotelo)’, 2023년 ‘디 애퍼처(The Aperture)’, 2024년에는 ‘앙개(Angae)’까지 런칭하며 밀레니얼 세대를 타깃으로 한 브랜드 포트폴리오를 넓히고 있다.
1997년 7월 삼성물산 의류부문 에스에스패션과 경영통합을 선언한 제일모직은 2013년 삼성에버랜드 제일모직 패션사업부문으로 이관됐다. 이듬해인 2014년 삼성에버랜드가 제일모직으로 사명을 변경했다.
다만, 제일모직은 브랜드와 품질의 명성 외에도 회장 오너일가의 승계와 관련된 합병 의혹으로 세간의 이목을 끌었다.
지난 2015년 5월 26일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 결의로 10년이 넘는 시간동안 재판이 진행되고 있는 점은 뼈아프다. 당시 양사는 시가총액 등을 반영해 삼성물산 0.35 대 제일모직 1의 비율로 합병을 결의했다.
이병철 창업회장의 손자인 이재용 삼성 회장은 양사 합병 이전 제일모직(23.24%), 삼성전자(0.57%), 삼성물산(0%) 등의 지분을 보유했지만, 합병 이후 제일모직·삼성물산 지분은 16.4%로 줄고 삼성물산이 보유했던 삼성전자 지분 4.1%를 추가로 확보하게 됐다.
이로써 이재용 회장이 삼성물산 지분을 다수 확보하게 돼 삼성전자 등 그룹 내 주요 계열사로의 영향력이 커졌지만, 합병 당시 삼성물산 소액주주(32명)를 포함해 국민연금도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삼성물산은 삼성그룹의 모태기업이며, 제일모직은 합병 당시 그룹 내 최상위 지배기업으로 꼽혔다. 주주들은 제일모직의 가치가 시장 평가보다 높게, 삼성물산 가치는 낮게 평가돼 손해를 봤다고 주장하고 있다.
한편, 올해 들어 삼성그룹 위기가 대두되면서 그룹 총수인 이재용 회장은 사내 영상을 통해 위기에 대처하는 자세를 강조했다.
이 회장은 영상을 통해 “경영진부터 통렬하게 반성하고 당장의 이익을 희생하더라도 미래를 위해 투자해야 한다”며 “기술 중시, 선행 투자의 전통을 이어 나가자. 세상에 없는 기술로 미래를 만들자”고 강조했다.
【 청년일보=선호균 기자 】